24년 1개월의 윤동주의 참회록이 나를 슬프게 한다
11월의 새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조락의 시간. 비움의 시간. 온통 아래로 추락하는 것 사이 하늘은 유난히 높아 보인다.
나무들의 듬성해진 틈과 틈 사이로 조각난 하늘이 점점 넓어진다.
문득 참회록 쓰기 좋은 아침이라는 생각을 한다.
부끄러움과 자기 성찰의 시인 윤동주는 그토록 푸른 나이에 참회할 것이 그토록 많았을까? 그 시대 상황이 참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때라 할지라도 시인의 참회는 지금도 가슴을 울린다.
< 참회록 >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는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을 문지르며 그 속에 남아 있는 자신의 얼굴이 욕되다고 말한다.
만 24년 1개월의 시간,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고 말한다. 강점기의 역사 속 지식인이 할 수 있는 것들의 부재. 결핍. ‘할 수 있음’보다 ‘할 수 있을 수 없음’ 앞에서 시인은 참회에 몸부림친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는 시인의 다짐. 참회는 ’어느 즐거운 날‘에도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24년 1개월인 그의 참회가 이토록 절절한 것이라면 나의 참회록은 얼마나 길어야 할까?
온통 부끄러운 일 투성이다. 내 몸을 통해 세상에 던져진 생명들에게도 양육자로서 부끄럽다. 쓰는 이로써 치열하고 맹렬하게 쓰지 못함에 부끄럽다. 읽는 이로써 날마다 태어나는 책들을 제대로 정성껏 다 읽을 수 없음이 부끄럽다.... 공동체 안에서 내 역할을 다하지 못함에 부끄럽다.... 가장 부끄러운 것은 ‘나다움’을 잃어가는 일이다. 세속의 것들에 깃들여가면서 ‘얼어붙은 인식의 바다를 깨트릴 정도의 인식의 자각’을 하지 못함이 부끄럽다. 참회해야 할 것들을 참회하지 못함이 부끄럽다. 푸른 시인의 참회 앞에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삶이 도리어 부끄럽다.
그래도 그 부끄러움을 참회할 수 있는 새파란 하늘이 있어 다행이다.
하늘의 틈이 점점 넓어진다. 새들이 틈과 틈 사이로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