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자작나무 숲에서 직립을 생각한다
대충 직립이 아닌 제대로 직립하기
자작나무 숲에서 제대로 직립을 생각하다
호모 에렉투스, 직립하는 인간, 네 발 동물이 두 발 동물이 된 시점, 직립인이 되면서 손이 자유로워졌다. 자유로워진 두 손은 도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똑바로 서게 되면서 시야가 넓어진다. 기어 다니는 아이들은 멀리 보지 못 한다 오직 눈앞의 것들만 집중한다. 엉거주춤한 상태에서도 시야는 한정된다. 바로 서는 것.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 진화의 산물이다. 그 사소하면서도 대단한 진화의 결과물로 인류는 수많은 문명을 이룩해왔다. 직립인이 된다는 것. 그리 생각하면 나무들은 대부분 직립 종이다. 기는 것, 감는 것, 여러 종류의 식물이 있으나 대부분의 나무들은 직립을 선택했다. 하늘을 향해 곧추서는 것. 두 팔 벌리고 하늘을 우러르는 것이다. 중력에 저항하며 서있다.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간은 잠들 때다. 직립일 때 우리 몸의 모든 곳은 뇌의 지배를 받고 뇌의 명령을 따른다. 당연히 뇌가 맨 위에 있으니까, 왜 인간의 뇌가 심장처럼 가운데 있지 않고 맨 위에 위치하게 되었을까 의문이 생긴다. 두개골로 보호된 채로 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두개골 안의 물렁물렁한 것, 즉 뇌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기에 미라를 만들 때 그것을 제일 먼저 꺼내어 동물의 먹이로 던져주었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심장을 뇌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무언가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우리는 아래에 두지 않고 가능하면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두려 한다. 뇌를 인간의 몸 중 가장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이 생존과 진화를 위해서 최적임을 어느 순간 깨달았을 것이다. 밤이 되면 누구나 눕는다. 하루 일과의 끝, 머리부터 발끝까지 뇌와 심장과 사지는 수평이 된다. 다른 장기들과 평등한 위치지만 뇌는 모든 기관이 잠들어있을 때조차 다른 기관의 일거 일투족을 감시한다. 뇌는 누워서도 직립하는 것일까.
무덤에 눕는 순간, 화장터에 눕는 순간. 또다시 육체는 평등해진다. 화장장의 뜨거운 불길이 뇌부터 순서대로 태우는 건 분명 아닐 것이고 관속의 부패가 뇌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직립인이다. 선채로 하루를 살고 계절을 살고 한 생을 살아간다. 중력에 저항하여 바로 서는 것. 직립인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일까?
우리는 누구나 우연히 던져진 인간이다. 어떤 도구로서의 용도를 증명하기 전에 이 세상에 던져졌고 걷지 못하니 누워만 있다가 기다가 엉거주춤 일어서고 비로소 1년쯤 되어서야 바로 선다. 그것은 연습과 반복 훈련이 결과라기보다는 발달의 단계이고 본능의 산물일 것이다. 무기력하게 던져진 우리가 일어서서 더 높은 하늘을 보고 세상에 맞서는 것, 중력에 저항하는 것, 직립하게 되면서 보이는 모든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존재 이유를 고민한다. 세상의 폭과 넓이 경계를 보고 느끼며 자신을 만들어간다. 도구로서의 자신, 다른 누군가의 도구가 아닌 자신을 위한 도구, 자신의 본성과 부합하는 도구여야 한다.
직립하는 자의 희열, 나무는 직립하는 것의 희열을 안다. 또한 직립의 고독과 고통을 안다.
바로 서야만 살 수 있는 세상 속에서 나무의 두팔은 하늘을 겨눈다.
끝없이 뻗어나가는 근원적인 직립의 기록, 나무는 허공을 향해 온몸으로 직립이라고 쓴다. 곧게 쭉 뻗은 하얀 수피의 자작나무들. 진한 갈색의 지흔은 부릅뜬 나무의 눈처럼 보인다. 나무가 직립을 포기하는 날은 아마도 나무의 생이 다하는 날일 것이리라. 비로소 부릅뜬 눈을 감게 될 것이다.
두 팔 우러러 하늘을 향하는 직립의 근원, 나무들을 본다.
제대로 직립하지 못하는 자의 부끄러움으로 나무를 바라본다.
대충 직립이 아닌 제대로 직립하기. 바로 서야겠다. 엉거주춤 눈치 보며 대충 직립하는 척하지 말고 진짜 자신으로 직립해야겠다. 맨 처음 직립의 기쁨을 누렸던 호모 에렉투스의 환희로, 호모 에렉투스의 꿈으로 돌아가야겠다./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