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나무는 나무 이상의 것이다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

나무의 침묵을 듣는다

나는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잔가지를 치며

나무의 침묵을 듣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가면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 기형도 < 겨울, 눈. 나무, 숲 >


모든 것을 드러낸 채 하늘을 향해 서있는 겨울나무. 군더더기를 생략한 채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는 나무가 자주 등장한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들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초록잎을 지닌 무성하고 우람한 나무가 아니라 모든 것을 떨어뜨린 나무다. 나목은 헐벗음, 궁핍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드러난 수형에서는 견딜 수 없는 어떤 결기가 느껴진다.


박수근 그림의 두드러진 특징은 단순함에 있다. 화려한 색깔이 없는 무채색의 세계다. 배경을 생략하고 질감을 살리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주로 나무와 여인을 그렸는데 아이를 업은 아낙네, 머리에 바구니를 인 행상, 들녘에서 일하는 아낙네들이 나무와 함께 표현되어있는 작품이 많다. 그의 작품에는 정면을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고 옆모습이나 뒷모습이 주를 이룬다. 특이하게도 남자들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설령 등장하더라도 할아버지나 손자 정도일 뿐. 젊은 남자 모습은 그의 작품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삶의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배경도 어딘지 명확하지 않으나 가둬지지 않은 곳임은 분명하다. 그림의 한 중앙에 거대한 나목이 등장하고 그 주변에 여인들이 있다. 그는 왜 나무 옆에 왜 여인들을 그려 넣었을까? 나무의 잉태성에 중점을 두면 여성과 나무는 잉태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같다. 나무는 잎을 잉태하고 꽃을 잉태하고 자잘한 가지들을 잉태하고 새의 노래를 잉태한다. 나무 주변의 여인 또한 잉태의 결과물인 아기를 업고 있다.

박수근의 나무와 두여인(1962.jpg

나무는 터를 삼아 뿌리내린 곳을 떠나지 못한다. 터를 삼은 그 자리에서 소멸한다. 자기가 잉태한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고 나무는 나무 인체로 남는다. 나무는 죽지 않는 한 해마다 다시 시작한다. 내가 나무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늘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날마다 시작한다. 가지의 끝에서 시작하고 뿌리의 끝에서도 시작한다. 허공을 향해, 깊은 심연을 향해 그 모든 시작들이 나무의 끝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사람들의 몸이 다 그러하지만 여인들의 몸은 늘 시작한다. 주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자궁벽이 비후 되고 생명을 품을 조건을 갖춘다. 잉태되지 않는 벽은 붉은 울음을 토하고 또다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그런 시작의 시간이 몸에 각인된 '여자'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늘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무언가가 끝없이 낸 몸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


박수근의 나무 그림이 좋아지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 그 나무만큼 깊어지고 있는 것일까.

위로 뻗은 만큼 아래로도 깊이 뻗어있는 나무를 우러른다. 겨울나무는 시작하는 나무다. 가지와 가지들이 붙들어 맨 허공에 수많은 수식어들을 잉태하고 있다. 수식어들이 나뭇가지 끝에서 발기한다.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 에는 행상인 듯싶은 빨강과 노랑 저고리를 입은 두 여인이 머리에 무언가를 이고 바삐 가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나무를 스쳐가나 나무를 향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행상을 하며 견뎌야 하는 생활의 흔적이 드러나지만 빨강과 노랑 저고리는 어떤 희망처럼 여겨진다. 머리에 무언가를 인 여인은 나무를 스쳐 지나가고 아이를 업은 다른 한 여인은 나무를 우러르고 있다. 시간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나무가 그녀들 곁에 버티고 서있다. 그녀들은 나무처럼 생을 버티며 살아간다.


박수근의 나무에는

잎새가 없다.

잎새란 잎새 모두 하늘에 준

가지,

그 가지 떠받친 줄기만 있다.

나무 아래로

아낙네 하나가 지나간다.

겨울을 팔고 봄을 사러 가는 그녀 발걸음이 동쪽을 향하고 있다.

그녀의 치마 고리가 몽톡하다.

길가엔

강아지 한 마리가 서 있다.

나무와 여자와는 좀

떨어진 곳,

강아지는 겨울나무를 쳐다보고 있다.

아니다, 강아지는 아낙네를 보고 있다.

아니다, 강아지는

그림 속에 없는 제 어미를 찾고 있다.

잎새를 떨친 나무 한 그루,

종종걸음 걸어가는 아낙네 하나,

강아지 한 마리뿐인

(......)

그냥,

울고 싶은 듯이...

-이수익, ‘박수근의 나무’ 부분


가스통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에서 "하나의 나무는 나무 이상의 것, 하나의 사람은 사람 이상의 것이다. " 라고 이야기 한다. 한 그루의 나무는 나무 이상의 것. 한 그루 나무 안에는 나무 이상의 것이 있다. ‘나무’라는 발음을 하면 벌써 초록 잎사귀의 쌉쌀한 맛이 입안에 느껴지고 향기로운 꽃의 부드러움이 씹힌다. 굵은 가지의 질감이 뽀드득 느껴진다.

나무(木) 나무의 모양을 빚대어 만든 글자고 근본을 뜻하는 글자 본(本)은 나무 목에서 파생된 글자다. 대지에 심어진 나무가 근본이라는 뜻이다. 대지에 뿌리박고 우뚝 선 한 그루의 나무는 세상의 근본이다.

"하나의 나무는 나무 이상의 것이고, 하나의 사람은 사람 이상의 것"

나무 속에 나무 이상의 것이 들어있고, 사람 속에 사람 이상의 것이 들어있음을 지각하기 위해.

내 안에 들어있는 '사람 이상의 것'을 찾아내기 위해 끝없이 어딘가를 향해 가지를 뻗어낸다. 어딘가로. 어딘가를 향해.......나목에 움이 트고 나목에 잎과 꽃과 열매가.... 피어나기를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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