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신역을 향해 가다
사려니 숲길을 걷는 날
사려니는 ‘신성한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졸참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편백나무, 삼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서식하고 있는 사려니 숲길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제주 생물권 보존 지역이다.
도종환 시인은 그의 시 <사려니 숲길>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이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어제도 사막 모래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걷고 싶은 길이라 한다. 당신도 나도 단풍들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가을 서어나무 길을 지나 길을 끊어놓은 폭설로 하루의 속도를 늦추게 해주는 겨울 삼나무 숲길을 걸어간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 마음은 건천이 되어가는 날 시인처럼 신역으로 뻗어있는 사려니 숲길을 걸어볼 일이다.
사려니 숲길 입구에 같은 제목의 또 다른 시가 있다.
<사려니 숲길>
아득한 옛날 제주 들녘을 호령하던
테우리들과 사농바치들이
숲길을 걸었습니다
그 길을 화전민들과 숯을 굽는 사람
그리고 표고버섯을 따는
사람들이 걸었습니다
한라산 맑은 물도 걸었고
노루, 오소리도 걸었고
휘파람새도 걸었습니다
그 길을 아이들도 걸어가고
어른들도 걸어갑니다
굴참나무 서어나무도
함께 걸어갑니다
우리는 그 길을 사려니 숲길이라
부르며 걸어갑니다
- 현 원학 -
테우리와 사농바치, 화전민과 숯 굽는 이, 표고버섯 따는 이들이 걸었던 길, 노루도 오소리도 휘파람새도 걸었던 길, 이제 오랜 세월이 흘러 새 사람들이 걸어간다. 사람과 더불어 오래도록 거기 있었던 굴참나무와 서어나무도 함께 걸어간다. 모든 숲길이 그러하지만 수많은 이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길. 발자국과 발자국이 중첩된다. 숲길에 문신처럼 새겨진 발자국들. 흔적들.
부질없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 때 정신은 더 피폐해진다. 무언가 머리 복잡한 것들을 품고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세속의 것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때로는 걸어보는 것, 최대한 단순한 사람이 되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거대한 삼나무 숲 아래를 걷다 보면 세속의 것들은 모두 작은 이들의 다툼이고, 결국 작은 이들이 더 작은 것들을 다투는 것이 세상살이임을 알게 된다.
버섯 따는 이, 말테우리, 사농바치들에게 사려니 숲길은 산책길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걸어야만 하는 길이었다. 숲이 깊을수록 먹을 것, 사냥할 것은 더 많았지만, 위험 요인도 그만큼 더 많아진다. 동네 뒷산처럼 오밀조밀하고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도 있지만 죽 뻗은 거대한 나무들이 밀집해있는 곳. 신역을 향해 길이 나 있다. 사농바치도 테우리도 표고 따는 여인도 너구리도 나무들도 사려니 숲길을 ~ 사려니 ~ 사려니" 하면서 넘었으리라. 사려니 숲길을 '사려니 사려니' 걷다 보면 세상은 정말 살만한 것이 될 터이니. 얼마나 자신이 작은 존재인가를 깨닫고 이 숲길을 걸을 수 있는 기회를 생각하고, 지상에서 내게 남은 시간을 알 수 없지만 떠올린다면 조금 전까지 내 가슴을 후벼 파는 세속의 것들에서 한걸음 떨어져 볼 수 있다.
붉은 황톳길, 하늘을 향해 찌를 듯 서있는 나무들.
마음이 건천이 된지 오래일 지라도 산다는 것은 축복이며 기회라는 사실을...
어떤 슬픔이, 어떤 절망이, 어떤 분노가, 가슴을 휘젓어 놓는다 해도 이 진한 초록을 마주할 수 있음에 기뻐해야한다는 사실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는 사실을...
그러하기에 신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길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인연들 또한 허투루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 길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한다는 사실을 ...
수없이 떠올리며 어딘가 분명히 존재할 내 삶의 신역을 향해 갈 것이다./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