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알라딘 중고 도서를 검색하다 류시화의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중고 책이니 만큼 상태가 ‘최상’ 혹은 ‘상’ 정도는 구입해야 하는데 오늘은 상태가 양호한 책들이 많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 덜 걱정했으리라.....’ 류시화가 속표지 아래에 웃고 있다.
배송된 알라딘 택배 상자를 열고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책을 꺼낸다. 갑자기 책 사이에서 우편엽서 한 장이 툭 떨어진다. GUAM NIKKO HOTEL이라고 적힌 엽서. 새하얀 호텔 건물이 푸른 하늘과 그 앞에 시원스레 펼쳐진 바다와 대비를 이루는 사진이다. 이 책을 소유했을 누군가가 쓴 글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글. 알라딘에 이 책을 중고로 팔았을 그 누군가는 분명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지금 암 로티엔 호텔 로비에 있다. 덩그런 여행 가방만이 내 옆에 놓여있다. 생각의 자유만큼이나 움직임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떠나온 여행이다. 아무에게도 구체적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무작정..... 바람 속에 가을빛이 있다. 내 마음에도 스며든다. 나는 무슨 고민과 열망이 그리도 많은가. 감정의 똬리 속에. 대충 살지도 않았건만 밀려오는 건 공허감뿐이다.'
글씨체와 글투로 보아 왠지 남자일 듯싶다. 나이는 아주 젊지도 아주 늙지도 않았을 법하다. 그는 왜 니코 호텔 로비에 앉아 이 엽서를 쓰고 있었을까? 누군가에게 보낼 것도 아니면서. 거의 일기처럼 독백체인 글. 분명한 것은 그가 현실로부터 떠나왔다는 사실이다. 도피인가? 구체적 여정도 밝히지 않은 채로. 사랑하던 사람과의 결별 의식인가? 직장으로부터의 탈출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오직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서.
그가 니코 호텔 로비에서 내려다본 바닷물은 무슨 빛이었을까? 진초록과 연초록, 연파랑과 진파랑이 층을 이루는 오묘한 바다 빛.
나도 괌의 바다를 기억한다. 괌은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높았다. 세부, 하와이, 괌 중에서 ‘괌’이라는 희한한 이름에 끌려 선택한 신혼여행지. 솔직히 괌에 대해 기억나는 건 거의 없다.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저녁마다 벌어지던 지방 민속춤 공연, 북소리와 현란한 율동. 그 모든 것들은 그다지 의미 있는 추억거리가 아니다. 오직 기억에 남는 건 괌 해변의 바다 빛이다. 모래는 유난히 가늘고 고왔다. 정오의 햇살은 모래를 조각조각 부수고 있었고 바다는 자기만의 속도로 밀려들어오고 밀려나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책 속에 끼워진 엽서 한 장. 괌 바다 빛을 닮은 초록 잉크로 쓴 가늘고 긴 글씨체. 그는 무엇을 고민하며 가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니코 호텔 로비에 앉은 그 고적한 남자에게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그의 짧은 글을 통해 그의 모습을 애써 유추해본다. 가을빛에 스며들 줄 아는 사람.
그가 내려다본 니코 호텔 앞 해변에는 수많은 신혼부부들이 연분홍 희망을 품고 결 고운 모래 길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기쁨이 바로 그 순간에 응집되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꾸 끊기는 기억의 필름 속, 나도 괌 전통 꽃이라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새빨간 꽃을 머리에 꽂고 흰 원피스를 휘날리며 그 해변을 걸었었다. 고적한 한 남자가 쓴 엽서 한 장이 오래된 나의 추억을 불러낸다.
‘대충 살지도 않았건만 밀려오는 건 공허함 뿐이다.’는 그의 말에 공감하며. 한 때는 그의 소유였던, 한 때는 그의 여행가방 속 필수품이었을 류시화의 책을 바라본다. 밑줄 하나 그어진 곳 없고 접어진 곳 하나 없는, 이름도 적히지 않은 누군가의 책. 이 책의 서문은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인용하고 있다.
그 나이였다.
시가 나를 찾아왔다
모른다.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서인지 강에서 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다.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파블로 네루다-
어느 날 누군가의 글이 내게로 왔다. 말도 아니고 침묵도 아닌 그것은 과거의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의 소유였던 책을 손 닿기 쉬운 가장 가까운 위치에 꽂는다. 그가 그 나이였을 때 니코 호텔 로비에서 고민한 것이 무엇이었을지를 상상하면서. 아무 지향도 없이 무작정 떠나야만 했던 고적한 남자의 뒷모습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