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우리 안의 '악'을 마주하는 불편함에 대하여
악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가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을 처음 읽으면서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종의 기원'은 '7년의 밤'을 읽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불편한 작품이다. 혈육 살해라는 잔인함에 책을 덮고 싶은 갈등을 여러 번 느끼게 했던 작품이다.
최근 벌어진 '세 모녀 살해사건'을 보며 책꽂이에서 정유정의 '종의 기원'을 더듬어 찾아본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 우리는 '선'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우리 안에는 저마다 발화되기만을 기다리는 '악'들이 부글거리며 대기 중인지도 모르겠다. 운전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머리채를 쥐고 때린 폭행 사건이나 '내 차 건들면 죽는다.'라 적어둔 벤츠 차주의 섬뜩한 메모나...
이 모든 것들은 세상에 돌아다니는 악의 극히 작은 빙산의 일부일 것이다.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는 '악', 그 '악'의 점화가 두려운 날들이다.
인간의 진화는 처절한 살육의 결과다. 생존의 법칙은 늘 포식자 위주다. 작가 정유정은 ‘종의 기원’에서 ‘유진’이라는 자기 본능에 충실한 인물을 토대로 인간 내부에 도사린 악을 밖으로 끌어내고 싶어 했다. 아니 끌어내는데 그치지 않고 악을 재점화시키고 싶어 했다.
‘종의 기원’의 첫 문장은 ‘피 냄새가 잠을 깨웠다’로 시작한다. 섬뜩한 문구다. 더 이상 읽어보고 싶지도 않은 문장들이 이어진다. 전형적 사이코패스 유진의 기행을 따라가는 내내 독자들은 당혹스럽다. 책의 첫 장부터 끝 장까지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당장 덮어버려야지 하면서도 사이코패스 유진이 결국은 단죄되리라는 희망을 품으며 마지막 장까지 숨도 안 쉬고 달려간다. 하지만 결말은 어이없게도 유진의 승리다. 누군가의 말처럼 호모 사피엔스 다음의 종은 사이코패스가 될지도 모른다더니 마치 그런 예언서라도 되는 양, 해진까지 살해한 유진이 아주 자연스럽게 펄떡이며 살아나 희끄무레한 도시 속으로 걸어간다.
유진은 원치 않은 임신으로 태어난 아이다. 말 그대로 계획 밖의 아이였다.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 없는 큰 아이 유민과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26년이란 세월을 엄마는 유진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엄마가 유진을 사랑하는 방식은 ‘보호’였다. 설령 그 아들의 내부에 약물로 억눌러야만 하는 어머어마한 악의 본성이 꿈틀거리고 있다 해도 엄마에게 유진은 오직 유진일뿐이었다. 정신과 전문의 유진의 이모는 유진의 내부에 도사린 파충류의 뇌를 통제하기 위해 리모트라는 약물을 처방해주었다. 유진은 두통 때문에 데굴데굴 굴렀고, 이명의 고통도 느꼈다. 유진에게 수영은 약물의 고통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이자 해방구였지만 엄마는 유진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영을 중단시킨다. 유진은 리모트의 부작용으로 고통받을 때마다 엄마와 이모에 대한 분노도 함께 키웠다.
유민과 남편의 죽음은 여름 휴가지 은하수 전망대 종탑 근처에서 벌어진 어이없는 사고였다. 엄마의 망막에 찍힌 마지막 순간은 유진이가 종탑의 종을 치려던 유민을 거세게 밀쳐내고 유민은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뒤늦게 달려와 유민을 살리려다 급류에 휘말린 남편의 죽음. 엄마의 망막에 찍힌 기억은 진실이 아니다. 먼저 종탑에 닿으려던 유진을 새총을 이용하여 무차별 공격을 하는 이기적인 형 유민, 유진의 잠재된 원시 뇌에 방아쇠가 당겨진 순간이다.
형의 비웃음, 자기를 이기려 하는 유진의 머리를 향해 비비탄을 발사하며
“ 너 아직도 안 죽었냐?”
“ 멈춰 이 새끼야.”
유진은 새 총으로부터 자기 방어를 하게 되고 극단적인 자기 방어는 상대방에 대한 가학적 공격이었다. 유진에게 그 순간 제일 중요한 것은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었다. 머리를 가격하는 비비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무조건 이기는 것이었다. 결국 유진은 엄마의 망막에 남겨진 프레임대로 살인의 책임을 둘러쓰고 26년을 살아왔다.
이미 죽어 세상을 떠난 유민을 닮은 해진. 엄마는 유민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애정을 해진에게 쏟고 싶어 하고 해진은 엄마의 양아들이 되어 유진과 함께 살게 된다. 엄마가 목격한 오래전 잔상이 유진의 현재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정신과 전문의 이모는 유진을 ‘프리디에이터’(predator) 포식자의 뇌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고 낙인찍는다. 잠재적 위험성을 미리 제거하기 위해서는 약물 부작용이 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약을 먹여야 했다.
유진의 머릿속에는 청군과 백군이 산다. 청군은 실용적, 백군은 냉소적인 역할이다. 천사와 악마의 개념이 아니다. 청군과 백군은 우리 안에서 내는 갈등의 목소리다. 우리 안에 있는 평범한 정상적인 범주들을 다 들어낸다면 결국 우리 안에 남는 건 무엇일까?
이 책의 유진은 엄마, 이모, 해진을 살해한다. 누가 악인인가? 당연 유진이다. 왜 작가는 당연한 악인인 ‘유진’에게 그토록 호의적일까? 해진을 죽이고 유진을 살아남게 한 의도는 무엇인가? 이 책의 제목 ‘종의 기원’은 유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포식자 유진이 끝까지 살아남아 ‘종’을 이어가는 살육의 이야기다.
악의 화신. 겉으로 보이는 악의 화신은 많다. 매일신문 지상에, 뉴스에 오르내리는 연쇄살인범들, 사이코패스 범죄자들. 정유정은 우리가 익히 아는 악의 화신을 거꾸로 뒤집는다. 진짜 악의 화신은 전문 지식, 보편적 사회 윤리, 모범적인 태도로 포장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이 때론 악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악이 멸망하고 선이 승리하는 소설에 익숙하다. 하지만 정유정의 ‘종의 기원’에서는 악의 재점화에 주안점을 둔다. 우리 안에 내재된 악. 문명, 규율, 질서, 도덕, 법, 이성의 카테고리 안에 가두어진 저마다의 악들. 어느 순간, 어떤 장소에서 저마다의 ‘방아쇠’가 촉발되는가에 따라 악의 점화도도 달라진다. 그 발화의 범주가 타인에게 심각한 해악을 끼칠 때 즉 비윤리적이며 반윤리적인 행위,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악’, 용서할 수 없는 ‘악’이라 규정한다.
우리는 저마다 ‘악’의 스펙트럼을 지니고 산다. 악의 스펙트럼에서 어디서 어디까지를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정유정의 소설 ‘종의 기원’은 솔직히 불편한 소설이다. 하지만 우리 내부에 도사린 악의 발화점, 악의 점화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우리 안의 이중성. 악의 역사는 어쩌면 아주 오래전 치열한 생존 경쟁을 거쳐 승자로 살아남게 된 우리 종의 생존 방식일 것이다. 결국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지령을 내리는 이기적 유전자의 소산이다. 권선징악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정유정의 ‘종의 기원’은 악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기 위한 섬뜩한 예방 주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는 법과 더불어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데 오로지 인간만 굶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 지상의 생명체 중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이 없는 종이었다."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 없는 종'.... 바로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 려원
* 본문 중에서 발췌
p 67 ˝행복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 아니에요.˝
해진은 잠시 틈을 두었다가 대꾸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해진을 봤다.
˝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 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해진은 나와 시선을 맞대 왔다. 그렇지?라고 묻는 눈이었으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뭔 얘기를 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다만 녀석의 덩치가 나보다 두어 뼘쯤 커 보였다. 나와 불과 한 살 차이였건만, 열 살쯤 차이가 나는 형 같았다. 심지어 어머니와 대등해 보이기까지 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물었다. 해진은 다시 시간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한 번쯤 공평해지는 시점이 올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그러려고 애쓰면요.˝
p 68`규칙에는 예외가 있었고, 예외는 곧 규칙이 되었다.`
p135 인간이 늘 `정답`을 선택하지 않는 건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의 눈금을 조금 낮추자 간단한 해결법이 보였다.
p 139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p 272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생의 1/3을 몽상하는 데 쓰고, 꿈을 꿀 때에는 깨어 있을 때 감춰두었던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마음의 극장에서는 헛되고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온갖 소망이 실현된다˝고.
p 275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는 법과 더불어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먹는 법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굶는 법을 동시에 터득하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 굶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오만 가지 것을 먹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으며, 매일 매 순간 먹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 지상의 생명체 중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이 없는 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