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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kin ye!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작은나무의 이야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원제는 The Education of Little Tree

이 책은 저자 포리스트 카터의 자전적인 소설로, 주인공인 ‘작은나무’가 고아가 되어 체로키족인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산속 오두막에 살면서 성장한 시간들의 기록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 자연의 이치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 감사의 마음과 사랑, 영혼의 마음을 교감하는 법을 배우며 성장한다. 인간이 만든 어떤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할 과목들을 배우며 영혼의 풍요로움을 품고 자란 작은나무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일깨워준다.

또한 자연의 이치를 벗어나 탐욕과 위선으로 점철된 현대 사회에 대한 고발도 보여준다. ‘작은나무’의 눈을 통해 보이는, 산 아래 마을에서의 일들, 입에 발린 말로 사람들을 속이면서 자기 욕심 챙기기에만 급급한 정치인들, 진정한 영혼의 구원보다는 이기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삼는 종교인들과 신도들, 가난한 소작농의 빗나간 자존심 등이 현대 사회가 지닌 모순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들어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보니 비 할머니로부터 글자 교육을 받고 셰익스피어를 함께 읽고 가끔 찾아오는 와인 씨에게서는 수리를 배운다. 작은 나무에게 와인 씨는 교육이란 두 개의 줄기를 가진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고 하셨다. 한 줄기는 기술적인 것으로 자기 직업에서 앞으로 발전해가는 법을 가르친다면 다른 한 줄기는 굳건히 붙들고 바꾸지 않아야 할 것. 가치라고 이야기한다.

백인들이 ‘작은나무’의 조부모를 찾아와 그들이 야만적인 인디언이라는 이유로, 또 아이를 방치한다는 이유를 들어 ‘작은나무’를 강제로 고아원으로 보내며 ‘더 좋은 교육’과 ‘더 나은 환경’을 강조한다. 하지만 산속 오두막집을 떠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작은나무를 바라보는 목사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부모가 백인처럼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어차피 지옥에 떨어질 사생아”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뱉어내는 야만, 수업시간에 보여준 암사슴과 수사슴 사진에 대해 작은나무가 짝짓기 하는 중이라는 말을 하자 ‘음란하고 더러운 악의 종자’라며 셔츠에 피가 묻도록 매질을 한다.



체로키 인디언은 미국 남동부 에팔래치아 산맥 남부에 거주하는 인디언 부족으로.

북미 대륙에서 유일하게 문자를 가진 인디언으로서 백인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838~1839년에 걸쳐 1만 3천여 명 정도의 체로키 인디언들이 오클라호마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당했는데. 1300킬로미터의 행진 중에 추위와 음식 부족, 병, 사고 등으로 무려 4000여 명 정도의 체로키들이 죽었다고 한다. 그 고난의 행군 과정을 ‘눈물의 여로’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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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부군이 인디언들을 강제 이주시킨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정부군 병사들이 찾아와 종잇조각 하나를 내보이며 서명을 하라고 했다. 새로운 백인 개척민들에게 체로키족의 토지가 아닌 곳에 정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서류라고 하면서. 체로키들이 거기에 서명을 하자, 이번에는 더 많은 정부군 병사들이 대검을 꽂은 총으로 무장을 하고 찾아왔다. 병사들 말로는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종이에는 체로키들이 자기들의 골짜기의 집과 산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체로키들은 저 멀리 해지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곳에 가면 체로키들이 살도록 정부에서 선처해준 땅, 하지만 백인들은 눈곱 만치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땅이 있었다.

병사들은 그 드 넓은 골짜기를 총으로 빙 둘러쌌다. 밤이 되면 빙 돌아 피워 놓은 모닥불이 총을 대신했다. 병사들은 체로키들을 그 원 속으로 밀어 넣었다. 다른 산과 골짜기에 살고 있던 체로키들까지 끌려와 우리 속에 든 소 돼지처럼 계속 그 원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이런 상태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체로키들을 거의 다 잡아들였다고 생각한 그들은 마차와 노새를 가져와, 체로키들에게 해가 지는 그곳까지 타고 가도 좋다고 했다. 체로키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차를 타지 않았다. 덕분에 체로키들은 무언가를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은 볼 수도 입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지켰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갔다.

정부군 병사들은 체로키들의 앞과 뒤, 양옆에서 말을 타고 걸어갔다. 체로키 남자들은 똑바로 앞만 쳐다보고 걸었다. 땅을 내려다보지도 않았고 병사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남자들 뒤를 따라 걷던 여자들과 아이들도 병사들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기나긴 행렬의 맨 뒤 쪽에는 아무 쓸모없는 텅 빈 마차가 덜그럭 거리며 따라왔다. 체로키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마차에 팔지 않았다. 땅도 집도 모두 빼앗겼지만, 체로키들은 마차가 자신들의 영혼을 빼앗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백인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갈 때면 백인들은 양옆으로 늘어서서 체로키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처음에 백인들은 덜그럭거리는 빈 마차들을 뒤에 달고 가는 체로키들을 보고 멍청하다고 비웃었다. 체로키들은 웃는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백인들도 입을 다물었다. 이제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향 산에서 멀어져 가자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가기 시작했다. 비록 체로키의 혼은 죽지도 약해지지도 않았지만, 어린아이와 노인들과 병자들이 그 까마득한 여행길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처음에는 병사들도 행렬을 멈추고 죽은 사람을 묻을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 수는 순식간에 몇 백몇 천으로 불어나, 결국 전체의 삼 분의 일이 넘는 체로키들이 행진 중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삼일에 한 번씩만 매장할 시간을 주겠노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마치고 체로키들에게서 손을 떼고 싶은 게 병사들의 심정이었다. 병사들은 죽은 사람들을 수레에 싣고 가라고 했지만, 체로키들은 시선을 수레에 누이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안고 걸었다. 아직 아기인 죽은 여동생을 안고 가던 조그만 남자아이는 밤이 되면 죽은 동생 옆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그 아이는 다시 여동생을 안고 걸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


병사들이나 행렬 양 옆에 서서 자신들이 지나가는 걸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는 일도 없었다. 길 가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중 몇몇이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체로키들은 울지 않았다. 어떤 표정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체로키들은 마차에 타지 않았던 것처럼 울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이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고 부른다. 체로키들이 울었기 때문이 아니다. 낭만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또 그 행렬을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슬픔을 표현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이 행렬을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죽음의 행진은 절대 낭만적일 수 없다. 과연 누가 어미의 팔에 안긴 채 뻣뻣하게 죽어 있는 아기, 어미가 걸어가는 동안 감기지 않는 눈으로 흔들거리는 하늘을 노려보고 있는 아기를 소재로 시를 지을 수 있겠는가? 과연 누가 밤이 되면 아내의 주검을 내려놓고 온 밤 내내 그 옆에 누워있다가 아침이 되면 일어나 그 주검을 옮겨가야 하는 남편과, 장남에게 막내의 시신을 안고 가라고 말해야 하는 아버지 그리고 쳐다보지도 말하지도 울지도.. 고향 산을 떠올리지도 않는 이들을 소재로 노래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절대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 불렀다.

마차를 타지 않고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볼 수도 입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오직 ‘그것’을 지키기 위해 똑바로 앞만 보고 걸었다. 긴긴 행렬 뒤로 아무도 타지 않는 마차가 덜그럭 거리며 따라왔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그것’은 자존심과 영혼이었다.


인디언식 사고방식에 따르면 영혼의 마음은 근육과 비슷해서 쓰면 쓸수록 더 커지고 강해진다. 영혼의 마음으로 가는 문을 여는 방법은 상대에 대한 이해다.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영혼의 마음도 커진다.


. - 75p

할머니의 이름은 보니 비(bonnie bee), ‘예쁜 벌‘이었다. 할아버지가 ˝I kin ye, Bonnie Bee˝라고 말하는 걸 들었을 때, 나는 할아버지가 ˝I love ye˝(˝당신을 사랑해˝ 옮긴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그랬던 것이다.

또 할머니가 이야기를 하다가 ˝Do ye kin me, Wales?˝라고 물으실 때가 있다. 그러면 할아버진 ˝I kin ye˝라고 대답하신다. 이해한다는 뜻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사랑과 이해는 같은 것이었다. 할머니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더더욱 없다. 신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 이해하고 계셨다. 그래서 두 분은 서로 사랑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세월이 흐를수록 이해는 더 깊어진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보시기에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생각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들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래서 두 분은 그것을 ‘kin‘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해’에 바탕을 둔다. 보니비 할머니와 웨일스 할아버지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I love you.) 대신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I kin ye)라고 말한다. 온전한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에 언급되듯이 누군가의 생에 또 다른 누군가의 생이 걸어 들어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그 사람과 함께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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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14

할머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하나의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마음이다. 몸을 위해서 잠자리나 먹을 것 따위를 마련할 때는 이 마음을 써야 한다. 그리고 짝짓기를 하고 아이를 가지려 할 때도 이 마음을 써야 한다. 자기 몸이 살아가려면 누구나 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과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할머니는 이 마음을 영혼의 마음이라고 부르셨다

P. 115

할머니는 어디서나 쉽게 죽은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하셨다. 여자를 봐도 더러운 것만 찾아내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쁜 것만 찾아내는 사람, 나무를 봐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고 목재와 돈덩이로만 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이었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죽은 사람들이었다.

걸어 다니는 죽은 사람.... 할머니가 말한 걸어 다니는 죽은 사람이라는 말에 생각이 멈춘다.

꽃을 보되 꽃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보되 나무를 보지 못한다.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책 속의 것들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내 안에 스며들지 못하는 한 죽은 지식일 것이다. 살아있는 것을 읽지 않고 활자 안에 가두어진 것만을 읽고 있는 것. 세상을 알아가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꾸만 시간에 쫓기듯 살아가며 여유를 잃어버리는 내가 결국은 걸어 다니는 죽은 사람이 아닐까.


정규 교육을 받기 위해 오두막을 떠나는 날 할머니는 작은 나무에게

“ 작은 나무야 늑대별 (시리우스) 알지? 저녁에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보이는 별 말이야. 어디에 있든지 간에 저녁 어둠이 깔릴 무렵이면 그 별을 쳐다보도록 해라. 할아버지와 나도 그 별을 볼 테니까. 잊어버리지 마라.” 말한다.

나무들의 속삭임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는 숲까지 전해지고 마침내 작은 나무는 돌아온다

열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돌아와 다시 산길을 걸었다,

나는 오랫동안 낙엽 위에 엎드려 누운 채 잠든 나무들에게 말을 걸었고 바람 소리에 귀 기울였다.

소나무 숲의 속삭임이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 작은 나무가 돌아왔네... 작은 나무가 돌아왔어!”

처음에는 낮은 허밍으로 시작된 그 노래는 갈수록 높아졌다. 시냇물도 노래 불렀고 개들도 노랫소리를 들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인사는

“ 이번 삶도 나쁘지 않았어. 작은 나무야. 다음번에는 더 좋아질 거야. 또 만나자.”

흔들의자에서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는 가슴 앞섶에 작은 나무를 위해 쓴 편지를 꽂아두었다

“ 작은 나무야, 나는 가야 한단다. 네가 나무들을 느끼듯이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면 우리를 느낄 수 있을 거야. 널 기다리고 있으마.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이번보다 더 나을 거야. 모든 일이 잘될 거다. 할머니가.”

작은 나무와 이별하는 두 사람의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다. 헤어짐에 대한 슬픔보다는 다음에는 더 좋아질 거라는 믿음,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확신..... 그리고 다시 만날 거라는 말은 떠남으로 인한 고통을 상쇄시켜준다.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만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너무나 단절되어 있고 아집과 편견으로 뭉쳐있고 약육강식의 논리에 능하다. 타인을 공감하는 일.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일... 설령 그것이 어려울지라도 노력해보는 일은... 내 영혼을 따뜻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저자 소개 : 포리스트 카터

포리스트 카터는 현대가 잊고 있던 인디언의 정신과 삶을 다시금 일깨워 준 작가이다. 그가 인디언에 주목하게 된 것은 할아버지와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할아버지는 농장과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는 체로키 인디언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었고 그로 인해 포리스트 카터의 삶에는 인디언의 사고와 문화가 배어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인디언들처럼 '작은 나무'였으며 필요한 것 외에는 대지에서 가져가지 않는 것 등 인디언의 생활철학들을 배웠다. 또한 자연의 신성함과 동물들의 의미, 농작의 원리에 대한 인디언들의 전통을 배우며 미국 사회가 말살시켜버린 인디언들의 문화가 가진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이런 어린 시절은 그대로 책에 담겨 있다. 그의 책은 인디언의 그것과 닮아 자서전 형식의 자연스러움으로 표현되고 있다.

* 저자 포리스트 카터가 '아서 카터'라는 이름으로 백인우월주의 집단인 kkk의 리더였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는 우리를 충격과 경악에 빠트린다. 그러나 작품 속 ‘작은 나무’가 그가 가공한 인물이든 자전적 인물이든 작가의 삶과는 별개로 작은나무 그 자체에 집중하여 읽는다면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그래도 영혼이 따뜻해지는 책인 것은 분명하다.

* 참고 자료

Little Tree 내 이름은 작은 나무 11

The Way 자연의 이치 21

Shadows on a Cabin Wall 할아버지와 조지 워싱턴 32

Fox and Hounds 붉은여우 슬리크 45

“I Kin ye, Bonnie Bee” “당신을 사랑해, 보니 비” 64

To Know the Past 과거를 알아두어라 79

Pine Billy 파인빌리 92

The Secret Place 나만의 비밀 장소 108

Grandpa’s Trade 할아버지의 직업 121

Trading with a Christian 기독교인과 거래하다 141

At the Crossroads Store 사거리 가게에서 163

A Dangerous Adventure 위험한 고비 178

The Farm in the Clearing 어느 빈 터에 걸었던 꿈들 204

A Night on the Mountain 산꼭대기에서의 하룻밤 220

Willow John 윌로 존 246

Church-going 교회 다니기 269

Mr. Wine 와인 씨 284

Down from the Mountain 산을 내려가다 299

The Dog Star 늑대별 322

Home Again 집으로 돌아오다 351

P. 115

영혼의 마음은 근육과 비슷해서 쓰면 쓸수록 더 커지고 강해진다. 마음을 더 크고 튼튼하게 가꿀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쓰는 것뿐이다. 게다가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부리는 걸 그만두지 않으면 영혼의 마음으로 가는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비로소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영혼의 마음도 커진다.

P. 26

˝그게 이치란 거야.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사슴을 잡을 때도 제일 좋은 놈을 잡으려 하면 안 돼. 작고 느린 놈을 골라야 남은 사슴들이 더 강해지고, 그렇게 해야 우리도 두고두고 사슴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거야. 흑표범인 파코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 너도 꼭 알아두어야 하고.˝

P. 146

˝자, 봐라, 작은 나무야. 나는 네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단다. 만약 내가 그 송아지를 못 사게 막았더라면 너는 언제까지나 그걸 아쉬워했겠지. 그렇지 않고 너더러 사라고 했으면 송아지가 죽은 걸 내 탓으로 돌렸을 테고, 직접 해보고 깨닫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어.˝

P. 252

할아버지는, 남에게 무언가를 그냥 주기보다는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훨씬 좋은 일이다, 받는 사람이 제힘으로 만드는 법을 배우면 앞으로는 필요할 때마다 만들면 되지만, 뭔가를 주기만 하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평생 동안 남이 주는 것을 받기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사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인격이 없어지고 자신의 인격을 도둑질당하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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