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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의 시간, 벽돌에 그려진 사람의 모습은 구석기인의

손바닥 벽화를 떠올리게 한다.

온통 연두의 계절이다. 지난겨울 나무들은 마른 가지의 끝으로 하늘에 금을 내었다.

4월의 나무들.. 뾰족했던 나무들의 끝은 온통 연두로 뒤덮여있다.

연두와 초록으로 중첩된 나뭇잎 사이 하늘이 보인다.

같은 장소 같은 위치에 서서 같은 나무를 찍는다.

눈 내리던 겨울 가로등이 켜지던 저 나무에도 연두가 내려앉았다. 저 나무는 나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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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 위로, 나무의 밑동에서 몸통으로 나무의 끝까지 더듬어 올라간다. 나무의 끝. 새들의 날렵함에도 봄의 윤기가 스며있다. 노랫소리에도 4월의 향기가 있다. 영겁의 시간.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초록의 성찬 앞에 인간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또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지를 새삼 실감한다

아무것도 없는 듯. 다 죽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한 겨울을 비움으로 버텨내고 이렇게 찬란한 초록을 만들어낸다. 나무의 끝에서 몽실 거리며 피어나는 것들은 연두이다가 연초록이다가 초록이다가 진초록이다가 그리고 어느 순간 초록을 버리고 초록에 가리어진 본래의 색을 드러내고 마침내 비운다. 나무가 무언가를 낳고 낳고 낳고... 연두를 낳고 초록을 낳고 꽃을 낳고 열매를 낳고 쉼 없이 되풀이되는 나무의 거룩한 몸짓이다.

이토록 숭고하고 거룩한 나무를 우러르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아침이다.


토끼풀 사이 벽돌이 눈에 띈다.

누군가 그려놓은 그림... 네모난 몸통에 철사처럼 가는 팔과 다리, 그리고 네모난 얼굴과 대충 그려진 머리, 상대적으로 큰 눈. 어릴 적 처음으로 연필을 쥐던 때 동그라미와 네모, 세모를 그리는 것이 가능해지면 본능적으로 사람을 그렸다. 어떤 아이들이든 그들이 그린 최초의 인간 그림은 대부분 공통적인 특징을 지닌다.

동그란 머리와 네모난 몸통 그리고 가는 선으로 단순화되어 표현된다. 얼굴에서 귀와 코는 대부분 그리지 않는 반면 눈은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진다. 입은 반달 모양으로 그리거나 일자로 그려 넣는다.

코와 귀보다는 무언가를 볼 수 있는 눈과 무언가를 먹을 수 있는 입, 또 발화 기관으로서의 입을 상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으로 여기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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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들은 사람의 얼굴에서 ‘눈’을 상대적으로 중요시 여기는 반면 서양인들은 ‘입’을 중요시 여긴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일본의 '헬로 키티'캐릭터. 분홍 리본, 까맣고 동그란 눈을 한 흰 고양이 캐릭터. 이 캐릭터가 서양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이 입이 그려지지 않아서라고 한다. 서양인들은 사람의 마음을 파악하는 수단으로 입꼬리의 움직임에 주목하는 반면 동양인들은 눈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동양인들에게 키티의 '입'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키티는 까맣고 동그란 눈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있으니까. 또한 우리는 이미 그 눈에서 무언가를 읽어내었으니까...



어떤 아이가 벽돌에 그려 넣은 사람 그림... 구석기인이 그린 벽화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 보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다. 아주 오래전 나도 이런 그림을 그렸던 기억...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동그랗고 세모나고 네모나던 인간을 그렸던 기억들이 몰려온다.

9천 년 전 생존했던 인류들이 아르헨티나의 ‘손 동굴’에 손바닥 도장을 남겨놓았다. 붉은 안료로 바위에 찍힌 수많은 손바닥들.. 어떤 유명한 화가의 작품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손바닥들이 지금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저요 저요’라고 손을 드는 교실의 아이들처럼 ‘여기 있음’을 드러내는 거룩한 몸짓처럼도 보인다. 벽면 가득 중첩된 손바닥들이 저마다 아우성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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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길에 만난 벽돌에 그려진 인간의 모습과 아르헨티나의 손 동굴에 찍힌 수많은 손바닥들은 생존의 기록이면서 남기고 싶은 몸의 목소리들이다. 연두의 계절, 나는 토끼풀 사이에 놓인 벽돌 그림에 귀 기울이고 멀리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듣는다.

굳이 '사람'을 그리는 사람들만의 의도를 사람인 나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영겁의 시간... 나보다 더 오래 이 공원을 지켜 온 커다란 나무 아래 앉아 어떤 아이가 그려 놓은 벽돌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다.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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