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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과거는 바로 현재예요. 안 그래요? 미래이기도 하고...

밤으로의 긴 여로 

 과거는 바로 현재예요. 안 그래요? 미래이기도 하고. 우리는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애써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인생은 그걸 용납하지 않죠.           

                                

  <밤으로의 긴 여로>는 유진 오닐이 가장 고통스럽게 써 내려간 자전적 희곡. 소뇌 퇴행성 질환으로 고통받으면서 탈고한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를 오닐은 사후 25년 동안은 절대 발표하지도 말며 그 이후에도 일절 상연해서는 안된다고 못 박았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작가의 고통스러운 자전적 이야기를 인간의 보편적 진실로 승화시킨 대표적 예술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이미 세상을 떠난 그에게 4번째 퓰리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호텔방에서 태어난 호텔방에서 죽은 유진 글래드스톤 오닐은 연극배우 제임스 오닐의 셋째 아들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티론. 메리, 제이미, 에드몬드, 4명의 대화로 구성되어있다. 유진 오닐의 자전적 상처를 다룬 작품으로, 돈에 대한 집착으로 가족들을 괴롭게 한 제임스 오닐은 제임스 티론에, 마약 중독에 빠진 어머니 엘라 퀸랜은 메리 캐번 티론에, 알코올 중독으로 생을 마감한 형 제임스 오닐은 제임스 티론 2세에, 그리고 유진 오닐은 에드먼드에 투영되어있다.   


티론 가의 사람들은 어머니 메리의 병세가 호전되자, 방랑 생활을 접고 별장에서 여름을 함께 보낸다. 모처럼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가족들은 금세 삐걱거린다. 어머니는 다시 모르핀을 맞기 시작했고, 에드먼드는 중병에 걸렸으며, 아버지는 여전히 가족들에게 인색하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자욱한 안개와 병든 고래의 신음 소리 같은 무적 소리가 암시하듯, 극은 천천히 슬픔 속으로 젖어든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목격한 순간, 어머니는 마약으로 아버지와 두 아들은 술로 도피한다. 어쨌든 그들에게 인생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쓰라렸다.     

   


  메리는 항상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고 있다. 웨딩드레스는 남편을 만나기 전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다고 기억되는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상징이다. 이제 과거는 잊어버리라는 티론의 말에 메리는 ‘과거는 곧 현재이고 미래라며 우리는 애써 빠져나가려 하지만 인생이 용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 원하는 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우리는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라고. 결국 메리가 찾는 것은 웨딩드레스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이다. 자신을 찾고 싶은 것은 메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남편 티론 또한 오델로 역을 맡았을 때의 대사 ‘우리가 부하가 된 잘못은 우리 운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는 말을 늘 기억하며 살고 있다. 공교롭게도 세계 도처에 널린 것은 행복의 길이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무(無)의 길’이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속하지 않고 혼자 안갯속에서 길을 잃고 목적지도 잃고 비틀거리며 헤매는 것, 인간은 결국 진정으로 누구를 원하지도 않고 누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상이 되지도 못한 체 살아가야 한다.’는 에드몬드의 독백. 에드몬드는 심각한 폐질환으로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


에드먼드 : 전 안갯속에 있고 싶어요. 정원을 반만 내려가도 이 집은 보이지 않죠.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죠. 이 동네 다른 집들도요. 지척을 구분할 수가 없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았죠.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들렸어요.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하던 거였죠. 진실은 진실이 아니고 인생은 스스로에게서 숨을 수 있는, 그런 다른 세상에 저 홀로 있는 거요. 저 항구 너머, 해변을 따라 길이 이어지는 곳에서는 땅 위에 있는 느낌조차도 없어졌어요. 안개와 바다가 마치 하나인 것 같았죠. 그래서 바다 밑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오래전에 익사한 것처럼. 전 안개의 일부가 된 유령이고 안개는 바다의 유령인 것처럼. 유령 속의 유령이 되어 있으니 끝내주게 마음이 편안하더라고요. 미친놈 보듯이 그렇게 보지 마세요. 맞는 말이니까. 세상에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에드먼드 : (시몬즈가 번역한 보들레르의 산문시를 신랄하고 풍자적으로 멋지게 낭송한다.) 늘 취해 있어라. 다른 건 상관없다. 그것만이 문제이다. 그대의 어깨를 눌러 땅바닥에 짓이기는 시간의 끔찍한 짐을 느끼지 않으려거든 쉼 없이 취하라. 무엇에 취하느냐고? 술에든, 시에든, 미덕에든, 그대 마음대로 그저 취해 있어라. 

그러다 이따금 궁전의 계단에서나 도랑가 풀밭에서나, 그대 방의 적막한 고독 속에서 깨어나 취기나 반쯤 혹은 싹 가셨거든 바람에게나 물결에게나. 별에게나, 새에게나, 시계에게나, 그 무엇이든 날아가거나, 탄식하거나, 흔들리거나, 노래하거나, 말하는 것에는 물어보라. 지금 무엇을 할 시간인지 그러면 바람은, 물결은, 별은, 새는, 시계는 대답하리라. ‘취할 시간이다! 취하라. 시간의 고통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거든 쉼 없이 취하라! 술에든, 시에든, 미덕에든, 그대 원하는 것에.     


  결국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한 생을 살아오면서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문과 문 사이 칠흑 같은 밤은 오게 마련이고 해가 뜨면 밤은 순식간에 소멸해버린다. 아침은 밤을 잃어버렸다. 밤은 잃어버린 아침의 다른 표정이다. 태양은 달을 잃어버렸고 달은 태양을 잃어버렸다. 안개 낀 밤. 유난히 깊고 자욱한 밤안갯 속을 더듬어 걷는 길. 새벽안개는 해가 뜨면 금시에 걷히리라는 희망을 품게 하지만 밤의 안개는 한참을 더 질척거리며 깊은 밤 안으로 걸어가게 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길을 잃게 마련이다.


  세 남자와 한 여인, 모든 것을 돈에 귀결 지으려는 아버지 티론과 마약에 의존하여 현실을 잊고 싶어 하는 아내 메리, 방황하는 청춘의 전형 제이미,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에드몬드. 슬프고 암울한 이야기다. 가족을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하는 감정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했더라면”의 나열, 돌아갈 수 없는 과거,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선 피아니스트가 될 수도 있었고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선 수녀가 될 수도 있었지만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인생의 동반자로 티론을 선택하면서 원치 않았던 삶을 살게 된 메리.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내린 선택을 되돌릴 수는 없다. 과거 한 시점에서의 선택은 그 당시에는 “옳음”이었을 테니까. 최선이 아니었다면 차선이었을. 차선도 아니었다면 최소한 최악은 분명 아니었을 선택이었을 테니까.  우리가 잃어버린 것, 되찾고 싶은 것. 그것은 다락방 트렁크 안에 꼭꼭 숨겨진 웨딩드레스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인 그것들의 중첩된 인연들. 어쩌면 그것은 유진 오닐의 것처럼 칙칙하고 참혹한 운명의 결과물일지 모른다.


                                                 "Night Windows", by Edward Hopper, 1928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밤의 창문들' 에는 열린 창문으로 얇은 커튼이 휘날리고 연분홍 슬립을 여인이 엎드려 무언가를 하고 있다. 방의 장식들은 거의 심플해 보인다. 깊은 밤, 불 켜진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방안의 풍경. 사람들 저마다의 삶이란 불 켜진 창문으로 들여다보이는 것과 같다. 보이는 풍경의 한 순간만을 포착하여 바라본다면 그것은 희극이거나 비극이거나... 희극과 비극 사이의 어떤 것이거나.. 무덤덤함 일상의 반복이거나 할 것이다. 분홍 슬립 차림의 여인은 일상의 풍경 속 어디에 있는 것일까?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그녀 삶의 단서를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얼굴에 드러나는 희로애락을 뒷모습에서 읽어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일생 동안 수없이 반복하고 있을 행동들, 습관들, 말투들... 그 모든 것들이 쌓여서 삶이 된다.


 우리가 떠올리는 과거 어느 한 시점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고, 지금 이렇게 무언가를 쓰고 있는 순간도 ‘과거 어느 한 시점’이 되어간다. 과거 어느 한 시점이 결정한 '나'를 만든 이는 바로 자신이기에 밤을 뒤덮은 안개 탓을 할 수는 없다. 지금 깊고 짙은 안갯속으로 발을 담근 것은 바로 자신이었으며 자신이 택한 ‘선택’의 결과이기에.  

 밤으로의 긴 여로. 안개 자욱한 밤안개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면 멈추지 말고 부지런히 걸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쉬지 말고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려원


P. 101 

과거는 바로 현재예요, 안 그래요? 미래이기도 하고. 우리는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애써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인생은 그걸 용납하지 않죠.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           

세상에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진정한 자신을 잃고 마는 거야.

        

- 제임스! 우린 서로 사랑해 왔어요! 앞으로도 항상 그럴 거고! 우리 그것만 생각해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걸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어쩔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씨름하지도 말아요. 운명이 우리에게 시킨 일들은 변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거예요.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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