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한 알을 먹는다는 것은 흙, 중력, 우주를 먹는 일
세잔은 "자연의 모습은 구형, 원통형, 원추형으로 나눌 수 있다."라고 말할 만큼 사물을 지극히 단순화시켰다. 세잔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화가 모르스 드나는 ”세상에는 세 개의 사과가 있다. 첫째는 이브의 사과, 둘째는 뉴턴의 사과, 세 번째는 세잔의 사과다. “라고 했다.
세잔 스스로도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고 했을 만큼 그의 정물화에서는 사과가 매우 중요한 소재다. 명료함, 간결함, 밝은 색채 등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소재가 사과였던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는 사과 모과차를 담았다. 모과의 깊은 맛에 사과의 상큼함이 섞인 그 차를 병에 담아 지인들에게 나눠주면 그 차를 먹는 겨울 내내 따뜻했노라고 전해주었다. 모과를 써는 작업이 상당히 힘들어 올해는 차를 만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투명한 병 속에서 사과와 모과와 뒤섞여 익어가는 것을 바라보던 그 기억을 다시 재현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글을 쓴 다음 농산물 공판장으로 달려가 잘 익은 모과와 사과를 사들고 돌아올지 모른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며 커다란 칼로 모과를 썰고 유리병 안에 새빨간 사과와 설탕 원당을 넣고 뒤섞는 작업을 하고 있을 지도....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과는 아마도 성경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일 것이다. 페리스의 황금사과 이야기나,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사과, 스티브 잡스의 애플사 로고, 로빈훗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과, 사과를 주로 그린 세잔의 사과.... 최근에는 ‘사과데이’라는 날도 있어서 사과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사과를 주며 사과를 청한다고 한다. 인류에게 ‘사과’란 과일이 역사적, 문화적, 과학적으로도 상당히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스피노자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마틴 루터의 말이라는 견해도 있다. 누구의 말이건 상관없이 중요한 사실은 내일 지구가 명망 하더라도 다른 나무가 아닌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다. 철학자 스피노자에게 ‘사과’란 과일은 무엇이었을까? 당시에 다른 과일보다 사과가 흔해서였을지. 아니면 사과를 개인적으로 좋아해서일지.. 알 수는 없지만 오래전 누군가가 사과나무 묘목을 심으려면 땅을 대충 파면 안되고 아주 깊이 파야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일은 지구를 심는 일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함민복의 시 ‘사과를 먹으며’는 사과 한 알을 먹는 일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사과를 먹는 우리는 나무의 일부를, 장맛비, 햇살, 소슬바람, 눈송이, 벌레의 기억, 잎새, 누군가의 땀방울과 지식, 사과나무의 나이테, 뿌리, 씨앗을 먹는 일이고 더 나이가 흙, 중력, 우주를 먹는 일. 마침내 사과가 우리는 먹는다는 역설에 이른다.
사과를 먹으며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함민복 '사과를 먹으며'
올해 사과나무는 이미 수확이 끝났을 것이다. 사과나무는 아마도 나목이 된 채로 이듬해 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키우는 힘은 아마도 눈송이든 햇살이든 새들의 노래든, 벌레의 기억이든. 꿀벌의 붕붕 거림이든, 새파란 하늘이든, 웅웅 거리던 바람소리든 우리가 기억하는 혹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모든 것들이 쌓여가는 데 있지 않을까?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