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을 건네다/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민병일 번역
붉은 소파 the red couch / Europe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Horst Wackerbarth)
세상에 말을 건네다
붉은 소파에 앉은 당신에게 누군가 말을 건다. 말을 거는 누군가는 인터뷰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 작가이기도 하고 붉은 소파이기도 할 것이다.
붉은 소파에 앉은 이들은 저마다 편한 자세로 앉아 저마다의 삶을 들려준다.
유명인도 있지만 꼭 유명인들로 이 책을 채운 것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그런 흔한 이웃들이다. 자신의 인터뷰가 책에 실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적당한 말, 듣기 좋은 말을 연습해서 나온 이들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이웃집 친구가 묻는 말에 대답하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과 없이 말하고 있다.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피터 유스티노프에게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행복이란 마음속 지평선에 펼쳐진 이상향이 아닐까요. 행복에 실제 다다를 수 없지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지만 언제나 행복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불행에 대한 질문, 사후세계에 대한 질문, 그리고 당신이 독자에게 하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에 그의 대답은 이렇다.
“질문은 이미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답을 기다리는 것뿐이지요.”
단지 답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들... 답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러함에도 우리들은 기다려야 한다.
당신의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제인 구달은 대답한다.
“친구들과 함께 와인을 마시는 거예요. 그리고 어머니 같은 지구에 인간들이 어떤 행동을 해왔는지 알리는 것, 동물들도 정신과 감정을 지닌 존재임을 알리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임무이며 가장 가치 있는 일이지요.”
"당신에게 불행이란 무엇인가?"
"두 번째 남편이 암으로 죽었는데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 "
동물 학자 제인 구달의 인생에 대한 의미는 의외로 단순하다.
불행이란 누군가의 고통을 알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오스트리아의 농부 요한나 한들은 농장 뜰에 놓인 붉은 소파 위에서 당신이 선택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에 대해 '백설공주'라고 대답한다. 백설공주가 되고 싶은 농부 여인의 꿈은 동화적이다.
아이슬란드의 여고생 클라라 시구르다도티르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생활하는 것이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녀에게 '최선'이란 어느 정도일까? 사람들에게 저마다 '최선'의 기준은 다르게 마련인데. 나는 그녀의 '최선 '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어놓았다.
'최선'.... 내 삶에 '최선'이 있었던가... 최선의 선택, 최선의 노력이라 하지만 실은 차선의 선택, 차선의 노력을 하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오늘 나의 화두는 '최선'이다. 그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것이 '최선'이라 여겨졌지만 돌아보면 '최선'이 아니라 심지어 '최악'혹은 '차악'인 경우도 있었다.
이 책에 수록된 대표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다.
당신의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중 최악인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가장 큰 바람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사후 세계에 대한 당신의 생각, 행복과 불행, 사랑의 정의...
독일 볼프하겐, 연금생활자 에디트 바커바르트에게 묻는다.
"당신이 선택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요?"
"쉰 살, 아니 서른 살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리 된다면 많은 일들을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였을 거예요."
"사후세계에 대한 당신의 기대는?"
"내 작은 가방 안에는 서류가 있는데 죽으면 나는 화장되어질 것이고 내 영혼과 유해는 통합될 것, 내 유골단지는 남편 무덤에 안치될 것이다.라고 적혀있어요."
에디트는 당신의 선택을 묻는 질문에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기를 택했다. 시간여행자처럼 돌아간다면 좀 더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알리나 시바라는 여인은 당신이 범한 가장 큰 실수를 묻는 질문에 “내가 살아있다는 거. 나는 불행한 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답한다. 살아있음이 불행이라는 그녀의 말에는 진실이 실려있다. "살아있어서 행복하다.", "삶이 행복이죠."라는 상투적인 말을 하는 우리에게 "살아있음이 불행이죠." 진실 어린 충고이기도 하다.
영국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은 불행이란 절망과 무기력에 빠지는 것이라 답한다.
가장 큰 바람은? “인간이 마침내 그들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우리를 서로에게, 영원으로, 미래로 과거로 묶는 것, 그것은 완벽한 감정입니다."
15살 마약중독자인 디미트루 부르라쿠는 길거리의 폐허가 된 건물, 운하에서 생활한다. 마약에 손을 댔고, 집을 나온 부랑아다. 사후 세계에 대한 당신의 기대를 묻는 질문에 “지옥에나 떨어지겠죠.”
당신에게 의미 있는 일은? "그건 바로 구걸이죠. "
수많은 이들의 인터뷰를 다 소개할 필요는 없다.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은 그들의 현재 모습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살아간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다. 의미 있는 일, 가치 있는 일, 소중한 것은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니, 배려니, 나눔이니 하는 형이상학적인 것들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해고 통지를 받지 않은 일이거나, 구걸, 폭행을 당하지 않는 일처럼 구체적이고 절박한 것들이다.
자신의 삶이 세워진 터전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곳이든 붉은 소파 위에서 사람들은 담담히 말한다.
붉은 소파, 세상에 말을 건네는 붉은 소파.
아무도 진지하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을 이들, 진지하고 의미 있는 질문이 처음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연출되지 않은 대화, 가공되지 않은 대화에는 진실이 묻어있다.
호르스트 바커바르트는 붉은 소파 하나를 메고 전 세계를 여행하는 전위 예술가다.
1950년 독일 프리츠라르 출생으로, 카셀 조형 예술 대학Academy of Fine Arts을 졸업한 뒤 사진작가와 비디오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예술과 미디어의 경계선상에 위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를 대표하는 작품은 ‘붉은 소파’ 프로젝트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여러 화가들, 영화 제작자들과 함께 각종 전시회나 서적,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 등의 분야에서 예술적인 작업을 펼치고 있다.
그가 붉은 소파 프로젝트를 통해 알고 싶었던 것, 독자인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소파가 있어야 할 상식적인 장소는 거실이거나 방이거나 사무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붉은 소파는 빙하 위, 절벽, 숲 속, 길거리 한 복판, 쓰레기장, 폐허가 된 건물, 사과나무 농장.... 눈 덮인 설원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의 붉은 소파는 세상을 여행 중 일 것이다. 어떤 이가 앉든, 어떤 이에게 말을 걸든 누구든 그 소파 위에 앉으면 진솔한 삶의 언어들을 마법처럼 술술 풀어낼 것이다.
눈보라 치는 언덕 위로 붉은 소파를 운반하는 사람이 있다. 썰매 개들 몇 마리가 소파를 끌고 언덕을 오른다... 쏟아지는 눈 속에 앞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가파른 경사길... 개들이 컹컹 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새하얀 눈과 붉은 소파의 대비...
누군가 설원 위에서 소파에 앉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가 붉은 소파에게 말을 걸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세상을 여행 다니며 깨달은 것은?"
"삶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붉은 소파인 당신의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당신이 초록 소파도 아니고 노랑 소파도 아니고 붉은 소파인 것에 만족하는가?"
"소파인 당신에게 있어 행복이란 무엇이며 불행이란 무엇인가?"
쏟아지는 질문 앞에....
붉은 소파는 어쩌면 침묵을 지킬지도 모르겠다.... 답을 기다리는 일만이 남아있다./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