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
우리는 날마다 ‘라’를 만들며 걷고 있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생활을 연구하던 인류학자가 부족의 아이들에게 사탕이 가득 든 주머니를 멀리 떨어진 나무에 매달아 놓고 자신이 출발 신호를 하면 맨 먼저 그곳까지 뛰어간 사람에게 사탕 전부를 주겠다고 약속해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갑자기 부족의 아이들이 다 같이 손을 잡고 바구니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무에 도착한 아이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아 사탕을 나눠먹었다.
인류학자가 충분히 사탕을 다 차지할 수도 있었을 아이에게 왜 제일 먼저 달려가지 않았는지 이유를 묻자 "다른 아이들이 슬퍼하는데 어떻게 혼자서만 행복할 수 있어요?"
아이들은 "우분투"라고 외쳤다. 우분투는 "사람다움"을 뜻하는데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도 담겨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혼자서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불교에서 '원을 넓히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원을 가지고 있다. 오직 자기 혼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원을 그리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원을 넓혀 두 사람이 들어오고 또 원을 넓혀 세 사람이 들어오고 점점 더 원을 넓히면 더 많은 이들이 들어올 수 있다. 확장하면 나라도 원이고 대륙도 원이고 지구도 원이다
경쟁사회는 자기만의 원을 중시한다. 자기 만의 원을 그리고 '여기까지'라는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상대방을 배제한다. 인류학자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하였던 것을 부족의 아이들이 보여준다. 바로 '우분투' '사람다움'이다.
원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애드윈 마크햄-
"다른 사람의 삶에 무엇인가를 보내면 그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온다."라고 마크햄은 말했다. 손에 손을 잡고 더 큰 원을 그려 원 안으로 초대하면 소외된 이 없는 진정한 사람됨의 세상이 될 것이다. 원은 시작과 끝이 없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영원'을 상징하기도 하고 공간적 의미로서는 안과 밖의 경계를 지어 원 안의 것을 보호하는 의미를 품고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 '동심원들과 정사각형들'(1913. squares with concentric rings) 정사각형 네모 안에 원들이 들어있는 작품이다.
원 안에 또 다른 원이 들어있는 구조인데 주로 빨강과 노랑 파랑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강렬한 느낌을 준다. 각자의 원을 구획하고 있는 정사각형은 원의 강렬함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눈에 띈다. 칸딘스키의 동심원은 정사각형 테두리 안에 들어있다. 이 동심원들의 공통점은 그 어떤 원도 완벽한 동그라미가 아니라는 점과 12개의 정사각형 안에 빨간색이 반드시 들어있다는 점이다. 서로의 선을 넘어서지 않으며 조화를 이룬다. 원은 영원이기도 하고 무한 반복이기도 하다. 내 안의 원을 넓히는 일. 웅크리고 내 안에 들어앉은 오래전 나의 치유되지 않은 것들을 이끌어내고, 내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배제시켜 버린 것들을 수용하는 일, 더 큰 원을 그려 세상의 것들을 포용하는 하는 일은 좁은 의미의 '우분투'라 할 수 있겠다.
살아가는 일은 원을 그리며 걷는 일이다. 저마다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걸음으로 자신의 생에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학교 운동장. 사람들이 삼삼오오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운동장에 그려진 트랙을 따라서 혹은 학교 담을 따라서 걷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앞서 걷는 이들을 따라 걷는다. 간혹 역방향으로 걷는 이도 있고 일부로 뒷걸음으로 걷는 이도 있다. 그들에게 걷기란 무엇일까? 건강을 위해서, 하루 종일 움츠린 상태였던 자신의 몸을 이완시켜주기 위해서 혹은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칸딘스키의 동심원들과 정사각형들이 무한정 펼쳐진 학교 운동장은 사람들의 동선이 빚어낸 만다라다.
범어로 Mandala는 ‘진수’ 또는 ‘본질’이라는 뜻이며 원(圓)을 뜻한다고 한다. 운동장에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뭉쳐 저마다 거대한 궤적을 그려놓는다. 마음이 복잡할 때 가장 단순한 일을 반복하는 일이 심리적 안정에 도움을 주는 것처럼 별다른 구조물이 없는 학교 운동장 모래 위를 걷는 단순한 반복은 생각의 복잡함으로부터의 탈출 법인지도 모른다.
걷는 것은 발이 하는 기도와 같다. 우리가 생각 없이 걷는다고 하지만 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며 걷고 있다. 일상의 삶에서 만들어진 괴로움들을 반복되는 트랙을 걸으며 뱉어낸다.
한 바퀴를 돌며 자기 안의 찌꺼기들을 내려놓고 또 한 바퀴 돌며 여전히 남은 것들을 내려놓는다. 돌고 돌아 개인들이 만들어낸 무수한 원의 궤적들. 원의 중심이 생겨나고 원의 지름들이 생겨난다. 거대한 만다라. 앞서 걷는 이의 원과 뒤따라오는 이의 원. 원과 원은 별개의 것이기도 하면서 중첩된 것이기도 하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누구의 원이었는지 누가 만든 궤적인지 알 수 없다. 원의 가장자리에 내려놓은 것들이 쌓여간다. 마음을 짓누르던 슬픔이나 중압감, 분노나 두려움 등 수없이 많은 부정적인 잔재들이 원의 가장자리에서 점점 더 밖으로 밀려난다.
만다라는 온전히 두루 갖춤의 상태다 그러나 만다라의 어미 ‘라’는 변화는 상징한다고 했듯.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라’를 만들며 걷고 있다. 학교 운동장에 그려진 거대한 만다라. 변화를 만들어 내는 수많은 ‘라’의 조각들도 흩어져있다. ‘라’의 조각들이 뭉쳐 또 하나의 새로운 ‘만다라’가 생겨날 것이다. 우리는 계속 걸어가야만 한다. 라의 조각들을 뭉치기 위해, 원의 가장자리로 부정적인 것들을 밀어내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