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지속하는 일도 권태롭다
권태/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그들에게 희망이 있던가? 가을에 곡식이 익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희망은 아니다. 본능이다.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의 내일은 왜 이렇게 끝없이 있나? 이상의 <권태 > 중에서
권태는 익숙함의 반복에 대한 마음의 반응일 것이다. 자신의 삶에 권태가 찾아오는 시간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이른 새벽,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 시계부터 바라본다.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하릴없이 시계 초침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시곗바늘 소리는 생의 발자국 소리. 전진하고 있다.
삶에 지쳐있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중단 없는 무한 반복이 권태롭다.
무한 반복으로 돌고 도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에서 튕겨나가고 싶은 날이 있다. 삶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있으면 권태로부터 자유로워질까. 그러나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 익숙한 무언가에서 벗어나는 것은 권태에서의 일시적 일탈일 뿐, 온전한 벗어남은 아니다.
또 다른 권태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삶이 견딜 수 없이 권태스러운 날이 있다. 무엇을 해도 새롭지 않은 날, 늘 같은 옷, 늘 같은 책, 같은 위치,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나는 권태로운 인간이다. 익숙함의 반복. 삶은 이어지는 권태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덧입는 과정일까, 반복되는 권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까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 내일은 왜 이렇게 끝없이 있나? 이상에게 권태의 ‘내일’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는 젊은 나이에 권태를 느꼈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가 떠나 마침내 도달한 곳에서는 권태 없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을까
머릿속에 권태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기억의 지속'이다'. 기억의 지속.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권태롭다.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권태마저도 기억한다는 의미일 테니까.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은 지극히 권태스럽다. 제각각 다른 시각을 가리키는 시계들. 하나는 마른 나뭇가지에 젖은 빨래처럼 걸려있고. 또 하나는 네모난 테이블 혹은 관의 모서리 걸쳐진 시계는 대략 6시 55분을 가리키고 있다. 중앙에는 눈을 감은 사람의 얼굴인지 새인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것이 배치되어있고 녹아 흐르는 것처럼 흐물거리는 시계가 그 위에 걸쳐져 있다.
<기억의 지속>에 등장하는 나무는 잎사귀 하나 없다. 땅이 아닌 네모난 테이블 위에 어정쩡하게 위치한 나무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뚜껑 덮인 주황색 동그란 시계 위에 모여 있는 개미와 녹아 흐르듯 걸쳐진 파란 시계 위의 파리떼만이 살아 있는 것들이다.
멀리 보이는 절벽과 물. 그리고 얇은 나무판자. 시계, 정체불명의 생명체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모여 있다. 장소도 모호하지만 해 질 무렵인지 해 뜰 무렵 인지 시간 또한 특정할 수 없다.
치즈 조각처럼 흐물거리는 시계들을 달리는 '시간의 카망베르’라고 표현한다. 치즈처럼 흘러내리는 시계, 멈춰버린 시간, 덧없이 모여든 개미와 파리떼,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권태롭다.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정체불명의 것도 권태로움의 상징이 아닐까.
저마다 시간은 상대적이게 마련인데 녹아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으로 형상화시킨 달리의 감각은 매우 직관적이고 탁월하다. 어떤 기계나 기록장치 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개념은 '기억'으로만 저장되고 소환될 수 있다. 시간은 사람의 기억과 무의식에 저마다의 시간으로 저장될 수 있음을 달리는 나타내려 한 것처럼 보인다.
기억의 지속. 우리가 권태스럽게도 지속하려는 기억은 대체 무엇일까? 기억을. 지속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마저도 권태로운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