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이 있을까
기다리는 존재다.
씨앗을 심는다. 까맣고 작은 씨앗, 동굴동굴 하거나 길쭉하거나 매끈하거나 거친 씨앗. 땅 속으로 묻은 씨앗이 땅 위로 싹을 내밀 때 씨앗은 더 이상 씨앗이 아니다. 땅 위로 솟아오른 연초록 직립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힘겹게 흙을 밀어내며 올라오는 일,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 보란 듯 눈부시게 솟아오르는 일,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자기 투쟁의 결과다.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이 저절로 움터서 땅 위로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쪼개버린다면 씨앗은 해체된 생명이다. ‘앎’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대상의 파괴가 선행되어야 한다지만 ‘앎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기다림이 전제되어야 한다. 기다림의 끝을 알 수 없을 때 기다림은 버겁고 지루하고 힘들다. 발달에는 도약의 단계가 있다 하더라도 도약의 시기가 오기까지의 기다림은 필수이며 삶은 기다린 시간들의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수많은 불신과 확신 사이에서 방황하고, 자기 연민과 자책에 시달린다.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라는 말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공허한 일처럼 여겨진다.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전진해야 하는 것,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간절함과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이다.
인디언들은 세도나 언덕에서 잠시 말을 멈추고 너무 빨리 달려 미처 쫓아오지 못한 자신의 영혼을 기다린다고 한다. 속도 사회에서 '기다림'이란 늘 어려운 일이다. 영혼이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달리는 사람들은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간다. 영혼을 기다리기 위해 멈춰서는 저마다의 새도나 언덕은 어디일까? 미처 쫓아오지 못한 영혼을 기다리는 장소 나만의 새도나 언덕은 어디일까?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황지우-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에 대해 황지우 시인은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 일부러 약속 장소에 일찍 간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약속 장소에 30분 정도 일찍 도착하여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그 혹은 그녀가 오기 전까지 책을 보며 기다린다. 가끔씩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들을 살피고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 걸어오고 있는 수많은 누군가들을 바라본다.
기다리는 시간은 축복의 시간이다. 만남은 어쩌면 기다림의 다른 말인지도 모른다. 차가 밀리거나 다른 이유로 그 혹은 그녀가 평소 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하여도 마음은 평안하다.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니까. 또각거리며 서둘러 들어서는 누군가의 미안한 표정을 바라보는 일도 재미있으니까.
어쩌면 기다리기 위해 약속을 정하는지도 모른다.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일.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것들을 한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메모를 하거나 읽다만 책을 보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것들을 관찰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즐거운 유희다. 햇살 비치는 창가나 가로등이 켜지는 저녁 무렵의 창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도 약속의 일부다.
기다리는 동안 청록색 바탕에 어깨를 드러낸 여인의 초상을 바라본다. 모딜리아니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공통점은 목이 유난히 길고 얼굴 또한 갸름하면서 길다.
터키 블루로 칠해진 눈에는 눈동자가 구별되어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모딜리아니 작품 속 여인들의 눈빛은 이미 기다리는 자의 눈빛이다. 발자국을 따라 여인의 터키 블루 빛 눈도 흔들린다. 여인은 이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랜 세월을 다하여 아주 먼 데서 오고 있는 누군가를 마중하기 위하여.. 그리고 오랜 세월을 다하여 아주 먼 데서 오고 있는 무언가를 마중하기 위하여.
어떤 기다림은 이별을 통보한다
테이블마다 촛불이 놓여있던 카페가 있었다. 일부러 촛불을 켜는 시간에 맞춰 약속을 잡았다. 지금은 카페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삐걱거리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우리 뉴욕에 가자”라는 영문이 빼곡히 적혀있던 화사한 핑크빛 벽지만큼은 선명히 떠오른다.
‘우리 뉴욕에 가자.' 우리 뉴욕에 갈까? 도 아니고 ’ 가자 ‘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느 때와 달리 유난히 늦는 그를 기다리며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가로등 불빛 아래 일시에 흩어지고 모이는 사람들. 횡단보도 위를 걷는 질서 정연한 이른 저녁의 행진들. 수많은 사람들 속 그를 찾아본다.
삐걱이는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촛불을 바라보는 표정이 낯설다. 그의 눈동자 속에 내가 없다. 어쩌면 꽤 오래되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시선을 외면하는 그에게서 삶의 무게가 느껴지지 시작했다. 촛불을 사이에 두고 헤어짐을 이야기한다. 이미 예감하고 있었지만 입을 통해 또박또박 발화되는 이별 선언은 당황스럽다.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우리 함께 뉴욕에 가자 “라는 문장을 나직이 읊조리고 있었다.
’ 우리 함께‘도 ’ 뉴욕에 가자' 도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촛불 켜진 그 저녁의 카페와 이별 통보를 받기 위해 기다리던 그 저녁의 흔들리던 촛불, “우리 함께 뉴욕에 가자”던 메시지가 중첩되어 떠오르곤 한다. 만일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였다면 뉴욕에 갈 수 있었을까?
지금은 갈 수 없는 지금은 기다릴 수도 없는 그 저녁의 시간들이다.
기다림의 끝은 혼자되는 시간이었다.
< 4 월 32일 >
내일 도착할 선물을 오늘 기다린다 아침이 오는 방향으로 누워있으면
귓속으로 초록 물이 차오른다
기다리는 자세에 따라 선물은 부풀거나 왜곡되거나 축소되거나
못쓰게 되거나 루머가 되기도 한다
어떤 선장은 먼 항해를 시작할 때 우울한 기운이 도는 선원은 배에
태우지 않는다
나의 연혁은 나쁜 예감과 자주 입을 맞춘다 내 안에 다리를 저는
행려병자 같은 신이 내 기도를 받아먹고살고 있다
5월은 서른한 개의 초록빛 상자를 풀어헤치기 시작한다
가도 가도 4월
- 김나영-
사람들은 누구나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사랑이든, 이별이든, 택배든, 선물이든, 합격이든, 당선이든.... 그것아 무엇이든.
저마다의 무언가를, 저마다의 누군가를 쉴 새 없이 기다리다가 생을 보낸다. 생의 끄트머리에 이르면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될까. 그때는 아마도 다가올 이별과 죽음을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기다리다 평생을 소비하는 것은 아닐까?.
기다리는 자세에 따라 내게 오는 선물은 달라진다. 원래 오려던 것에서 왜곡되거나 축소되거나 부풀려진다.
가도 가도 4월이기를 바라는 시인의 셈법대로라면 30, 31일에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달력의 숫자는 무의미하다.
"어떤 선장은 먼 항해를 시작할 때 우울한 기운이 도는 선원은 배에 태우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항해는 오랜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변화무쌍한 바다에 우울한 기운이 도는 선원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삶에서 나는 선장이기도 하고 선원이기도 하다. 우울한 기운을 지닌 채로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이미 지쳐버린 모습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삶이라는 항해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제대로 된 기다림의 자세가 아닐 것이다. 멈추어 있기를 바라는 달력의 숫자,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꾸만 줄달음질 친다.
달력은 이미 서른한 개의 초록빛 상자를 정신없이 내 앞에 펼쳐 놓았다.
연두와 초록이 뒤섞인 거리... 이팝나무 새하얀 꽃은 눈처럼 곱다.
내일 도착할 선물을 위해 오늘 제대로 된 '기다림의 자세'를 고민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