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 지라도
사랑
사랑이 그대들을 부르면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 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감싸 안을 때 전신을 허락하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을 상처 받게 할지라도
사랑이 그대들에게 말할 때 그 말을 믿으라
비록 북풍이 저 뜰을 폐허로 만들 듯 사랑의 목소리가 그대들의 꿈을 흐트러뜨려 놓을지라도
사랑이란 그대들에게 영광의 관을 씌우는 만큼 또 그대들을 괴롭히는 것이기에
사랑이란 그대들을 성숙시키는 만큼 또 그대들을 베어버리기도 하는 것이기에
칼린 지브란 ' 사랑에 대하여' 중에서
클림트의 키스. 남녀의 손과 얼굴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인물들의 옷과 배경은 기하학적이다. 직사각형, 타원, 삼각형, 소용돌이 모양. 금빛 채색 속 도형들은 질서와 무질서의 공존을 보여준다.
그림 속 패턴 속에는 클림트만의 생물학적 은유가 숨어있다고 한다. 남자의 가운에는 주로 흑백의 직선과 사각형이 가득하고 여자의 옷에는 둥근 도형, 동심원이 가득하다. 남녀 옷을 장식하고 있는 패턴은 정자, 난자, 혈액 속 적혈구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클림트의 의도를 우리가 온전히 알 수는 없다.
공간적으로 두 남녀가 키스에 몰입해있는 장소는 절벽처럼 보인다. 여인의 발끝은 절벽의 끝에 닻처럼 정박해있다. 서로에게 몰입해 있으나 위태로운 사랑. 그들의 사랑은 평지가 아닌 절벽 끝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보이는 그들은 사랑에 모든 것을 다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의 사랑이 완성되는 곳은 절벽 끝이다. 이성을 내려놓고 본능에 의지해야 하는 최적의 장소다.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 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감싸 안을 때 전신을 허락하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을 상처 받게 할지라도"
클림트 그림의 생물학적 은유처럼 정자와 난자의 만남, 혈액 속에서 적혈구들의 즐거운 춤,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상황까지 가 보질 않았다. 사랑 앞에서도 판단을 하고 있는 나를 본다. 어떤 사랑의 한 복판에서도 다음 사랑으로 건너감을 생각한다. 어느 순간 사랑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면 절벽 끝까지 가는 것을 포기해버린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이상과 현실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한 클림트 스타일의 완전한 사랑에 이를 수 없다.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는. 추상적인 사랑의 결과물들이 클림트의 <키스>에서는 이토록 구체적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절벽이 아닌 평지에서 마주한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침드라마에서나 쓸 수 있는 금기어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사랑의 포화상태, 도처에 사랑은 존재하지만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사랑을 원하는 것인지 사람을 원하는 것인지.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사람은 구체적인 것이다.
함께할 사람을 원하는 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 원하는 것이 ‘사랑’인가. 그에 대한 답도 쉽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것인가? 사랑하면서 원하지 않는 것은 없을 테니까. 일상 속에서 사랑을 보았다. 가식적이지 않은 존재 그대로의 사랑.
낯선 이들을 바라보는 일은 흥미롭다. 버스를 기다리는 이, 횡단보도를 걷는 이, 마트에서 무언가를 사는 이들, 특정한 관계로 규정되지 않은 누군가들을 아무런 부담감 없이 바라본다. 우리는 모두 그냥 누군가의 누군가 들이다. ‘주의 깊게 보다’가 아닌 ‘그냥 보다’ 즉 시선 가는 대로 바라본다.
마트 계산대 앞에 서있는 청바지에 흰 셔츠를 맞춰 입은 중년 부부에게 시선이 고정된다. 남편은 계산대에 물건을 하나씩 하나씩 올려놓는다. 아내는 계산대 위의 물건을 정돈하며 남편을 보고 웃는다. 그냥 마주 보고 웃는다. 남편의 흰 티셔츠 칼라를 세워주며 아내는 또 무언가를 속삭이듯 말한다. 쇼핑한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으면서도 그들은 쉼 없이 웃고 또 무언가를 말하며 웃는다.
무엇이 나의 시선을 그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주차장으로 가는 내내 그들은 얼굴을 맞대고 무언가를 말하며 또 서로 웃고 있다.
군데군데 흰머리가 보이는 희끗한 머리칼. 명품 티셔츠를 입은 것도 아니고 흰색 면티셔츠에 청바지를 세트로 입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외모를 지닌 그들에게서 빛이 난다. 그들에겐 마주 보고 할 말이 아직 많이 남아있고 웃음 지을 것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사실 부부가 오랫동안 함께 살다 보면 상대방의 눈빛만 보아도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미 익숙해져서 웃음이나 대화는 때로 정해진 매뉴얼 같다. ‘이럴 땐 이런 식의 반응을 해야겠지’. ‘이런 말을 하면 기분 상할 테니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대본을 외우는 배우들처럼 이미 매뉴얼화된 삶을 살아간다. 상대를 배려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좋은 의미의 길들여짐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타성적이고 진부한 길들여짐이다.
서로를 길들이고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현대인의 결혼생활이 아닐까. 적당히 웃고 적당히 표정 관리를 하는 것. 상대방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드러내지 못하는 것들은 마음 아래에서 상처가 된다. 서로를 해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마음이 병드는 이는 자신이다.
쉼 없이 마주 보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그들의 모습에서 야생의 아름다움을 본다.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서로만을 지극하게 바라보는 것. 그들의 사랑은 언제, 어디서든 한결같을 것이다. 단순하지만 심플한 흰 티셔츠와 청바지에는 여전히 푸른 그들의 시간이 있고 눈빛에는 존중이 스며있고 입가에는 배려가 머문다. 절박하고 위태로운 사랑이 아닌 일상에서의 사랑에서도 혈액속의 즐거운 춤은 계속되고 있다.
길들여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여전히 찬연한 것, 여전히 야생적인 것들을 나는 감히 ‘사랑’이라 부르고 싶다. 숲길에서 발견한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풀... 잎사귀가 완벽한 하트다.
인위적으로 만든다 해도 이토록 완벽한 하트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자연이 만든 거룩한 하트 앞에서 나는 또다시 흰 티셔츠 청바지 부부의 미소를 떠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