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삶을 살지 않은 채로 죽지 않으리라
* 불과 재의 변주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아모스 오즈의 『나의 미카엘』 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마카엘 고넨과 한나는 테라 상타 대학의 계단에서 처음 만난다. 미카엘은 이상, 꿈과 같은 것 ‘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 현실은 이미 불이 타버리고 남은 ‘재’에 불과하다고... 미카엘은 주어진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정확하게 돌기를 바라는 남자다. 반면 한나는 가슴 안에 자신을 태우고도 남을 충분한 ‘불’을 지니고 있다.
이미 재로 존재하는 남자. 평온하고 침착하고 동요하지 않고 성실하며 일상적인... 학구적이며 친절하고 조용한 남자 미카엘. 불이라 칭할 수 있는 한나는 꿈속에서 여전히 쌍둥이들과의 만남을 지속하고, 강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타오르고 싶은 한나의 불은 너무도 평온하고 침착하고 규칙적인 남자 미카엘에 의해 제대로 타오르지 못한다. 미카엘이 그녀의 불을 타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나의 미카엘’에 갇혀있는 것이다. 제대로 타지 못한 그녀의 불은 우울증으로 나타나고 쇼핑 중독으로도 나타난다.
‘불’과 ‘재’의 만남은 ‘불’과 ‘물’의 만남만큼이나 모순적이다. 재는 동요하지 않는다. 이미 타버린 것, 이미 내려앉은 것들, 어떤 바람도 재를 다시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 불은 바람에 예민하다. 불은 타오르는 것. 바람의 방향과 세기는 예측 불가한 것, 불도 언젠가는 재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한나처럼 밤새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도 흔적조차 남지 않은 일상을 어찌할 수 없다.
누군가와 살아간다는 것.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우연히 동행이 되어 그 동행이 삶의 동행이 되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삶은 기차 여행의 연속일 것이다. 멈추지 않는다. 옆자리의 동행과 한나와 미카엘이 그러한 것처럼 일상의 건조한 대화를 나누고. 피상적인 잡담을 나누고. 뉴스거리들을 이야기하고, 해야 할 것들을 이야기하고 적당한 예의와 적당한 균형과 적당한 거리감과 적당한 친밀감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서로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적당한 사회적 도덕적 경계의 선을 넘지 않으며. 적당히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잘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 필요하다. 내 안의 어쩔 수 없는 힘들. 어쩌면 나도 한나처럼 불을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미카엘의 ‘재’를 겉에도 두르고 있으니 불과 재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셈이다. 나는 때로 불이고 나는 때로 재다.
어쩔 때는 걷잡을 수 없는 불꽃이 일어 나를 태운다. 어느 순간 그 강력한 불꽃은 사그라지고 나의 일상은 다시 재의 일상이 된다. 규칙적임, 이성적임, 논리적임, 성실함. 불을 감추고 있는 재. 불이 아닌 재, 재가 아닌 불, 불도 재도 아닌 사람, 타고 있는 재와 타지 않는 불...
그 경계 어딘가에 내가 있다.
도나 마르코바의 시를 읽는다.
"나는 삶을 살지 않은 채로 죽지 않으리라
넘어지거나 불에 델까
두려워하며 살지는 않으리라
나는 나의 날들을 살기로 선택할 것이다
내 삶이 나를 더 많이 열게 하고
스스로 덜 두려워하고
더 다가가기 쉽게 할 것이다.
날개가 되고
빛이 되고 약속이 될 때까지
가슴을 자유롭게 하리라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으리라
씨앗으로 내게 온 것은
꽃이 되어 다음 사람에게로 가고
꽃으로 내게 온 것은 열매로 나아가는
그런 삶을 선택하리라"
- 도나 마르코바 -
"삶을 살지 않은 채로 죽지 않으리라"는 도나 마르코바의 목소리와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죽고 싶지 않다."라고 외치는 한나의 목소리가 자판 위에서 겹친다. 그 목소리들 사이 내 목소리도 존재한다.
대충 살다 죽고 싶지 않다. 삶을 살지 않은 채로 죽지 않으리라는.... 내가 본래의 ‘나’인 채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지닌...'불'도 '재'도 아닌 그러나 '불'이면서 '재'이기도 한.......
바람은 밤새 마른나무를 뒤 흔들지만 나무는 뿌리 뽑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바람이 불지 않은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