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이였을 때. 베를린 천사의 시

불어오는 바람에 내 무게를 느끼고 싶어. 오직 지금 말이야!

아이의 노래

피터 한트케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나니기도 하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나는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알고 있는 것이 내가 듣는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 조각은 아닐까?

악마는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일뿐인데 그것이 나일 수 있을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

시금치와 콩양 배추를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잘 삼킨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낯선 침대에서 잠을 깼다

그리고 지금은 항상 그렇다

옛날에는 인간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지금은 상상만 한다

허무 따위는 생각 안 했지만

지금은 허무에 눌려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아이는 놀이에 열중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열중하는 것은 일에 쫓길 뿐이다

'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사과와 빵만 먹고도 충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딸기만 손에 꼭 쥐었었다. 지금도 그렇다

덜 익은 호두를 먹으면 떨떠름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산에 오를 땐 더 높은 산을 동경했고

도시에 길 때는 더 큰 도시를 동경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렇다

버찌를 따러 높은 나무에 오를 땐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 삼아서 나무에 던지곤 했는데

창은 아직도 꽂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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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보았던 영화... 이제는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영화의 첫머리에 등장하던 시가 피터 한트케의 <아이의 노래>라는 시다. '베를린 천사의 시'의 영어 제목은

"Wings of Desire "라고 한다 열망의 날개들이라니...


인간 세계를 굽어보기만 하던 천사 다미엘이 알레칸 서커스단에서 공중곡예를 하는 마리온을 본

그녀를 만지고, 느끼고 싶어 한다. 인간과 천사의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영원히 살면서 천사로 순수하게 산다는 건 참 멋진 일이야.

하지만 가끔 싫증을 느끼지. 영원한 시간 속을 떠다니는 나의 중요함을 느끼고 싶어.

내 무게를 느끼고 현재를 느끼고 싶어.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지금'이란 말을 하고 싶어.

지금, 바로 지금 더 이상 '영원'이란 말은 싫어."


다미엘과 곡예사 마리온의 사랑.. 그녀를 위해 기꺼이 영원한 삶을 버리고, 날개를 버렸다.

현실이라는 무게를 느끼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무엇보다 '지금'이라는 말을 경험하고 싶었던 천사 다미앨.... 그 영화의 첫머리에 다미엘의 목소리로 낭송되는 <아이의 노래>..

영회보다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했던 수많은 질문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나는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일뿐인데 그것이 나일 수 있을까?..

아이는 놀이에 열중했지만 지금은 일에 쫓길 뿐.. 아이가 창 삼아서 던진 막대기는 아직도 꽂혀있다.


내 안의 나.. 내 안에 저장된 수많은 나를 물티슈를 꺼내듯 날마다 하나씩 꺼내어 쓰는 것인지... 내 안의 나는 사라지고 새로운 나로 생겨나는 것인지. 내 안의 나에 또 다른 내가 결합되어 제3의 나로 변해가는 것인지.... 거울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알 수 없다

'나'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늘 변화하는 '나'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익숙함 속에서 '나'가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 homesickness > 1940 가 있다. 정면을 바라보는 사자와 등 돌린 검은 옷의 천사.. 나는 이 작품의 제목이 < 사자와 천사>인 줄 알았었다 안개 낀 도시... 다리의 난간에 기대어 검은 옷의 남자(천사)가 도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도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자가 다리 위에 앉아있다.

사자와 천사.jpg

향수병... 남자는 지금 무언가를.. 어딘가를 그리워하고 있다. 왔던 곳... 되돌아가기 위해서 혹은 되돌아가야 하는 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그의 고독한 뒷모습과 별개로 사자의 표정은 장소에 연연하지 않는 듯하다

향수병이 사자에게도 적용된다면.... 사자가 그리워할 고향은 사바나의 초원일 것이다... 수사자이다.

위엄 어린 갈기. 사자 무리를 통솔했을 것만 같은 근엄함.. 사자는 도시를 바라보지 않는다. 사자가 바라보는 그 어딘가는 그림에 나와있지 않다...

등 돌린 남자의 모습... 아이가 아이였을 때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장소로 돌아가고자 함이 아닌..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온통 질문만 던져도 세상이 완벽히 이해될 것만 같은 시절로.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로..

억지로 표정을 짓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기만 했던 오래전 그 시절로.

누구나 아이가 아이였던 그 시절로........


내 안에 여전히 존재할지도 모르는 지극이 작은 아이에게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봄날...........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도 바다가 된다고 당연히 생각했던 그 유년의 봄날로...../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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