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퍼니 퀴담 단원들의 공연 작품인 '허벌트의 꿈'에는 거대한 4m의 인간들이 등장한다
부풀어있지 않은 상태에선 날개를 접은 하얀 새처럼 보인다.
왜 작품 제목이 ‘허벌트의 꿈’일까? 그에 관한 설명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하였다.
아이들에게 익숙한 영화 꼬마유령 캐스피를 닮은 동글동글한 몸. 접힌 몸 안에 꿈이 어느새 가득 들어찬 것일까?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몸. 한 걸음 씩 내딛기도 부자유스러울 법한데 컴퍼니 퀴담 단원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동그랗고 풍만한 몸. 상대적으로 매우 가늘고 작은 발. 가분수처럼 보이는 커다란 몸이 그 작은 발에 의지해있다. 축 처진 몸, 꿈을 접은 몸. 그러나 어느 순간 어떤 요인이 그들의 몸에 꿈을 가득 채우는 것일까?
허벌트들이 입장한다. 가녀리고 길고 새하얀 몸으로
허벌트들이 풍선처럼 몸을 부풀린다.
허벌트들이 뚱뚱한 뒷모습으로 퇴장한다.
잔디 위로 꿈이란 것들을 뿌려놓고.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지만 일상을 시작하고 있다. '허벌트의 꿈'공연은 서울에서 열리는 거리 축제의 하나라 한다. 코로나 2년 만에 이제는 꿈을 꾸어도 된다는 격려의 메시지일까..
네덜란드 작가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러버덕은 2007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세계 16개국을 순회하며 전시를 계속하고 있다. 2014년에 서울에 왔던 러버덕이 8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샛노란 고무 오리 인형. 어릴 적 욕조에 둥둥 띄우고 놀았던 기억들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오리가 호수에 떠 있다.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연못 위의 거대한 노란 오리는 특정 누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무엇을 위해서?라는 강요된 목적은 없다.
단지 존재함으로써 거대한 노란 오리는 우리 안에 잊힌 동심과 순수함을 떠올리게 한다.
컴퍼니 퀸 담 단원들의 ‘허벌트의 꿈’이나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러버덕'은 모나지 않고 둥글다. 위협을 느끼게 하지 않는 부드러운 곡선이 있다.
어쩌면 팬더믹 동안 우리는 꽤 많이 지쳐버렸는지도 모른다. 드러내지 않았을 뿐 뾰족한 것들을 마음 안에 감추고 있었는지도. 그러하기에 새하얀 풍선 사람처럼 보이는 ‘허벌트의 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것이리라.
10월이 되었다. 아침부터 이무렵이면 자주 들을 수 있는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들려온다.
한경혜 씨가 곡을 붙인 이 노래는 원래 노르웨이 가수 Anne Vada의 ‘Dance towards spring'이었고 그 후 secret garden이 ’serenade to spring'으로 리메이크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가을이 첫머리에 익숙한 멜로디가 노르웨이에서는 봄의 서막을 장식했다는 사실이 새롭다.
김동규의 목소리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듣는 아침... 그 노래를 들으며 ‘허벌트의 꿈’을 생각한다.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 라는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겨울에서 봄으로, 가을에서 겨울로..... 하나는 겨울에서 벗어나는 춤이고, 다른 하나는 겨울로 향하는 춤이다. 눈부신 이 계절이 더 찬란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제 또다시 겨울을 향해 가야 함을 마음이 먼저 알기 때문이리라. / 려원
<사람학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지음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던 책을 세상에 내었다.
책에 내가 바라던 것들을 오롯이 담아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변해간다는 사실이다.
책의 한 페이지를 쓰던 날의 나와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나... 사이에는 또 얼마나 먼 거리가 생겼을까.
크고 동그랗고 새하얀 허벌트들을 생각한다.
사실 꿈이란 게 그런 게 아니겠는가.
축 처진 허벌트 안에도, 온몸을 최대한 부풀린 허벌트 안에도, 그리고 공연을 마치고 퇴장하는 허벌트 안에도 꿈이란 존재했을 테니까.
10월의 어느 멋진 날, 창가에 앉아 있다. 내 안의 꿈을 부풀려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