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관에서 두 방울의 꿀과 활자의 진실에 대한 생각을 하고 돌아오다
활자의 힘을 믿는 것일까.. 종이에 무언가를 적으려는 사람들은
산속에 모셔두면 평소에 자주 가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부모님을 가까운 추모관에 모셨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한 것. 처음에는 매주 찾아뵙다가 어느 순간 가까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다.
추모관에 모인 사람들. 네모난 작은 방 안에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닌 이들의 흔적들이 있다.
평소에 쓰던 물건들. 여권, 안경, 반지, 만년필... 작은 미니어처 소품들.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의 시간들이 유골함 겉에 기록되어 있다.
그 간격을 헤아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동부 유럽 우화에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여행자가 사나운 야수를 피해 달아나다가 텅 빈 우물 속에 숨는다. 하지만 우물 바닥에는 용 한 마리가 입을 넓게 벌린 체 여행자를 먹어치우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야수가 기다리는 우물 밖으로 다시 나갈 수도 없다. 여행자는 우물 벽에 자라난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는다. 물론 나뭇가지에 영원히 매달려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쥐 두 마리가 이미 나뭇가지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뭇가지는 여행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유일한 위안거리는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꿀 두 방울이다. 꿀을 핥는다. 그 순간만큼은 야수와 용의 공포를 망각한다. 하지만 결국 여행자는 두 방울의 꿀이 아무리 달콤하다고 한들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잠시나마 좋았던 기분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이 우화에 대해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죽음이라는 용이 나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려고 어김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한 채 삶이라는 나무에 매달려있다. 물론 나에게는 끔찍한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어주는 꿀 두 방울이 있다. 바로 가족을 향한 사랑과 내가 예술이라 부르는 글쓰기를 향한 사랑이다. 하지만 이조차 더 이상 달콤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든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추모관에 모인 이들. 그들 앞에 생(生)에서 졸(卒)로 이어지는 생의 숫자는 무의미한 기록일 뿐이다. 삶이란 수많은 선택지가 있을 듯 하지만 실은 우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결국은 두 방울의 꿀로 귀착될 것이다.
불교에서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절벽에 매달린 상황에서 꿀을 핥는 어리석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기억된다. 삶이 주는 쾌락. 위험의 순간에 직면하면 말초적인 쾌락이 더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꿀을 탐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인지 본능인지 욕망인지, 바꿔 말하면 살려는 의지인지... 한 마디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삶에서 내게 주어진 꿀 두 방울은 무엇일까? 톨스토이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글쓰기에 대한 사랑이라 하였다. 두 방울의 꿀. 내게 유일한 유희라고 할 만한 것들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무엇이 꿀 인지도 모르면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두 방울의 꿀의 정체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네모난 작은 격자 속 사진들을 바라본다. 간단히 기도나 묵념만을 하고 돌아서기엔 어디지 아쉽다. 높이 매달아 둔 수첩에 무언가를 적는다. 자주 와보지 못한 죄송함과 안부를... 그리고 너머의 세계에서의 행복을.. 그리고 후손들을 살펴주시라는 부탁 같은 것들을....... 어떤 시간들의 무력감을.. 점점 덤덤해져 가는 마음을 그러면서도 늘 쓸쓸한 것들을.. 고해성사하듯 그 작은 메모 수첩에 적는다. 활자로 남기는 것. 그 말들이 고인에게 가닿을 듯싶지는 않지만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말이란 사라지는 것. 분해되는 것. 되돌릴 수 없는 것. 문자란 기록이다.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여 있는 것들이다. 설령 그 순간의 마음에 불과할지라도. 마음을 종이 위에 붙잡아둔 흔적이다.
시부모님을 추모관에 모신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아래 칸에 아직 그곳에 모시기엔 너무도 젊은 여인이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너무 젊어서 놀랐고 두 번째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어서 놀랐고 세 번째는 그녀의 아이들 이름 때문에 놀랐다. S와 H였다. S가 중1, H가 초6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수업에 오던 아이들이었으니까.
그녀의 유골함 옆에 매달린 메모 수첩이 활짝 펼쳐져있다. 무언가를 적어두고는 그대로 펼쳐둔 채 가버린 모양이다. S가 엄마에게 보낸 글이 보인다. 본능적으로 글자 중독인 나는 고인 앞에서 염치 불고하고 그 글을 읽는다. 그녀도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명색이 나는 그 아이들의 글쓰기 선생이었으니... S의 글을 조금 읽다가 덮어버렸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직 어린 남매의 글.. 그 아이들의 글에 비하면 메모수첩에 적어놓은 내 글은 진솔하지 않았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죄송함이라 하였지만 사실은 자기변명과 합리화였고 너머의 세계에서의 안부를 물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형식적인 것인지도 모르겠고 결국은 후손들을 잘 살펴달라는 일종의 부탁을 쓰고 있었던 것일 테니까. s의 글에 나는 s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래전이라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딸 사랑이 유별났던 그녀도 생각났다. 늘 활기가 느껴지던 그녀의 맑은 목소리도 생각났다.
“엄마 이곳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 문장 하나에 나는 펼쳐진 그 메모 수첩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어른인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무엇을 적었는가. 이미 세상살이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우셔야 할 분들에게 이곳 일을 잘 챙겨달라고 적고 있으니...... 활자에는 특별하고 신통한 힘이 있어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 모여 사는 그곳에 가닿는다고 생각하면 나는 부끄러운 글을 남긴 것이었다. 동그란 안경을 쓴 앳된 얼굴의 s가 나보다 더 어른이었다.
돌아오는 내내 꿀 두 방울에 대한 것과 S가 쓴 그 문장 하나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줄타기의 순간에 나를 끌어당기는 꿀 두 방울.
그것은 유혹일 수도 있고, 그릇된 욕망일 수도 있고 어리석음 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을 ‘생의 의지’라고 생각하고 싶다.
2022년 추석이다.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어김없이 보름달이 떴다.
“이곳 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쉬세요.”
나는 시부모님께.. 그리고 추모관의 그녀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글로 남기진 않았지만 이번엔 마음이 그들에게 가 닿기를 바랐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려원
오랜 시간이 흐르면 이른 새벽 자판을 두드리던 나를, 나의 소리를 어느 누가 기억해줄까.
소리로 소환되는 기억을 뒤에 남겨진 누군가는 헤아려 줄 것이다.
저 멀리 숲 속에서 저마다의 북소리 들려오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 들려온다.
자판 위에.......
지금은 부를 수도 없는 이름을 적고 있다. P 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