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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의 우화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음에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16세기 플랑드르 지역의 풍속화가 피터 브뤼겔(1527~1569)은 `장님의 우화(1568)`라는 그림은 마태복음`에서 화제(畵題)를 따왔다고 한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모두가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장님들의 우화.jpg


피터 브뤼겔의 작품 <장님의 우화>에는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아닌 어딘가 길을 잘못 접어든 것처럼 보이는 6명의 장님이 등장한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앞사람과 연결된 막대기 혹은 앞사람의 어깨를 붙잡고 걷고 있다.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첫 번째 장님은 이미 구렁텅이에 빠져버렸고 두 번째 장님의 몸도 무게 중심이 이미 앞으로 쏠려있어서 머지않아 쓰러질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장님의 표정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장님은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표정이다. 막대기만 잘 붙잡고 있으면 모든 일이 해결되기라도 하듯... 막대기가 그들에겐 구원의 상징처럼 보인다.


16세기는 여러 면에서 유럽의 가장 어두운 암흑기다. 예술적 표현에도 규제가 심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피터 브뤼겔은 암시적인 풍자를 그림에 장치처럼 끼워 넣었으리라. 여섯 명의 장님들 뒤로는 첨탑이 있는 교회가 보이고 모이를 주고 있는 사람,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동물이 보인다. 마을을 휘돌아 가는 강물에서 목을 축이는 동물도 보인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이다. 마을의 그 어느 누구도 절벽처럼 보이는 경사로를 걷고 있는 6명의 장님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알지 못하기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게 아니라 설령 안다고 해도 나서서 그들을 구원해줄 마음이 없는 것이리라. 교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길잡이가 되는 첫 번째 장님의 뒤를 장님들은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 인도하는 이에게 모든 것을 의지한 그들에게선 자기 삶의 개선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지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더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장님의 우화>에 등장하는 6명의 장님들은 위태로움에 직면해있는데 그림 중앙의 교회는 아름답고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것에는 무관심한 그 당시의 교회를 비판한 것이기도 하면서 어떤 맹목성이 보여주는 참혹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잘못된 길을 따르는 것. 옳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조차 망각해버린 맹목. 우리 사회에 맹목적인 것들을 좇는 예는 무수히 많다.

교육도 그러하고 언론도 그러하고... 어떤 소규모의 모임이든 대규모의 조직이든 사람들이 모이는 것에는 일종의 맹목적인 광기가 존재한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 태생적인 장님이 아니라 우리는 어느 순간 후천적인 장님이 되어가고 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에는 눈을 감아버리고 내게 익숙하고 유리한 것만 보려는 선택적 장님 놀이를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이 던지는 화두는 16세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금. 현대라는 시점에서도 피터 브뤼헬의 <장님의 우화>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길잡이의 그릇된 판단과 그 길잡이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행동과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는 교회, 평화로움을 가장한 잔혹함까지도..

여전히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 피터 브뤼헬의 풍자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들의 퀭한 시선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혹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전하려는 메시지처럼 여겨진다.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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