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영원 회귀. 왜, 무엇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니체의 영원 회귀
어느 날 낮 혹은 밤에 악령 하나가 슬며시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너는 네가 지금 살고 있는 대로 그리고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이 삶을 다시 살아야 할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이 살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저 네 삶의 모든 고통과 모든 기쁨과 모든 생각과 모든 한숨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소한 일부터 중대한 일까지 전부 다 동일한 차례와 순서로 똑같이 반복될 것이다. 여기 나무들 사이의 거미와 달빛까지도 이 순간 나 자신까지도 반복될 것이다.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가 계속해서 뒤집히고 또 뒤집힐 것이다. 그리고 작은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 너 역시 함께 뒤집힐 것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
니체는 모든 것을 되풀이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사람이며, 가장 살아있는 사람이며, 가장 긍정적인 사람이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의지는 늘 시간을 향해 분노한다. 시간이 우리의 의지를 가로막는다고...
책상 위에 커다란 모래시계가 있다. 떨어지는 모래의 움직임을 보고 싶어서인지, 모래가 만들어내는 파동을 보고 싶어서인지... 위에서 아래로의 떨어짐 뒤 다시 뒤집는 유희를 반복하고 싶어서인지 모르겠다.
소멸 없는 과정을 되풀이한다면 영원히 되풀이해도 좋은 삶을 살고 있는가? 니체의 질문은 바로 그것이다. 모래시계 안의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에 불과한 네가 다시 뒤집히고 다시 뒤집혀 그 일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느냐고.. 모래시계 어디선가 니체가 묻고 있다.
문득 시시포스 신화가 떠오른다
하데스에서 언덕 정상에 이르면 바로 굴러 떨어지는 무거운 돌을 다시 정상까지 계속 밀어 올리는 벌을 받은 인간. 시지프, 시지프스, 시시포스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오디세우스의 아버지인 그가 자신을 데리러 온 죽음의 신을 묶어버려 아레스가 구해줄 때까지 죽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죽음의 신을 속인 죄로 굴러 떨어지는 돌을 끝없이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시시포스가 벌을 내린 신에게 저항하는 방법은 ‘굴러 떨어짐과 동시에 밀어 올려야 하는 고통’을 ‘유희’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시간에 속한 존재이고, 또한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이 공포, 바로 거기에 자신의 최악의 적이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만다. 내일, 자신의 전 존재가 거부했어야 마땅한 그 내일을, 그는 내내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시시포스 신화, 알베르 카뮈
날마다 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약간의 다름은 있지만.... 비슷하고 익숙한 패턴 속에서 정말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때론 어떤 방향성을 잃어버린듯한 느낌도 있다. 어디로, 왜, 무엇을.... 인생의 좌표를 놓쳐버린 채 시간에 끌려 살아온 것 같은 상실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떨어짐의 순간이 지나면 누군가가 다시 모래시계를 되돌려준다. 아마도 영원회귀가 인간의 숙명이라면 되돌리는 이는 ‘신’ 일 것이고. 모래시계를 뒤집는 것은 신에게는 단순하고 시시한 유희일 것이다.
떨어지는 것을 밀어 올리는 것과 다시 위로 올려져 떨어짐을 반복하는 것...
그 모든 것이 계속되어도 좋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질문을 던진 니체는 그리 살았을까?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삶을?
그 또한 그리 살지 못하였으리라. 그러하기에 영원회귀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긍정하는 삶을 살라고 당부한 것이 아닐까?
책상 위 모래시계는 계절이 없지만 창밖의 풍경은 어느새 가을이다. 그러나 작년 가을과 같을 리 없다. 가을은 가을이지만 영원히 회귀되는 가을은 아닌 것이다. 지난해 가을 장미 나무에 둥지를 튼 벌레가 올해도 같은 가지에 둥지를 틀리 없다. 다른 계절 속에 나 또한 달라지고 있다. 가을이라는 명칭, 나라는 명칭...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 안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해가고 있다.
굴러 떨어지는 무언가를 받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삶에서 저마다의 바위는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어떤 이에게 굴러 떨어지는 바위는 ‘자기 자신’ 일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것, 직업... 자존심.... 수많은 것들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크기의 돌덩이라 할지라도 바위로 다가오기도 하고 조약돌로 다가오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시 밀어 올려야 하고... 그 상황을 만들어 준 신이 있다면 한껏 웃으며 그 유희를 즐겨야 할 것이다. 신의 유희를 방해하는 확실한 방법은 즐기면서 밀어 올리는 것이다.
다시 유리 안의 모래를 바라본다... 갇혀 있는 세계지만 치열한 세계일 것이다.
왜 떨어져야만 하는지 묻고 있는 모래 한 알이 있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 본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P129
보르헤스는 "현재란 규정될 수 없는 것이고 미래란 현재적 기다림이며 과거는 현재의 기억"이라고 말했다. '현재'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현재는 더 이상 현재가 아니기에 모래시계의 좁은 구멍을 통과하는 모래 입자들의 움직임은 규정될 수 없는 것들이다.... 발췌
모래시계를 책상 앞에 놓아두는 나의 의도를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유한함을 배우기 위함인지.
모래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기 위함인지. 전지전능한 신처럼 되풀이의 유희를 즐기려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