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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어디에 도착해있는가?

지금 여기를 떠난다는 것은 거기 어딘가에 도착한다는 말이 아닐까. 컨텍트

컨텍트(2017 개봉작) /원제는 어라이벌(arrival). 감독은 드니 빌뢰브


언어는 인간의 사고체계를 변경시킨다. 또한 인간의 사고는 그에 적합한 언어를 만든다.

- 언어학자 사피어 워프의 가설


‘ 컨텍트’ 우주 외계 생물체와의 만남을 다룬 sf영화라는 점에서 인터스렐라 혹은 마션, 인디펜덴스 데이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 영화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소설이 원작이다. 인터스텔라나 마션이 더 이상 황폐해진 지구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계를 찾아가는 인류의 몸부림에 대한 영화라면 이 영화는 헵타 코드라 이름 지은 거대한 두족류가 12개의 우주선을 타고 지구에 찾아오는 영화다. 인디펜덴스 데이가 외계 생물체의 지구 침공을 다루고 있는데 비해 켄텍트는 말 그대로 외계 생물체와 지구인의 만남, 언어학적 접촉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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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가 희귀병에 걸린 딸 한나를 떠나보내며 오열하는 첫 장면과 물리학자인 이안과의 만남으로 딸을 잉태하는 기쁨으로 마무리되는 끝 장면은 한나( hannah) 라는 회문구조적인 이름과 마찬가지로 순환적이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순환’에서 찾을 수 있다. 루이스의 독백처럼 개인의 삶이란 결국 시간과 공간의 경험이 축적, 누적된 것의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는 실재했던 과거와는 별개일 수 있다.


영화는 외계 생물체인 헵타포드와 루이스 박사의 대화를 중심으로 느리게 진행된다. 그와는 별개로 거대한 미확인 물체가 착륙한 12개국은 국가적 재난 상태가 벌어지고, 외계인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작전에 돌입하며 긴장감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전 세계가 외계 생물체로부터 얻어낸 정보들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다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네트워크 공유를 거부하며 더더욱 혼란에 내몰린다.

헵타포드가 보여준 원형글자 “ use weapon"을 ” give weapon"으로 나라마다 자의적 해석을 내리면서 중국은 외계 생물체가 지구인을 공격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 생장군의 입장을 지지하는 나라들이 늘어나면서 외계 생명체와 지구인의 대 전쟁이 시작되려는 순간 루이스는 햅타포트의 언어를 해석하는 능력을 갖게 되고 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결국 외계 생물체가 인류에게 주고자 했던 것은 시공을 초월한 헵타포드어를 주는 것. 헵타포드어의 해석을 통해 인류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헵타포드의 문자는 원형으로 생겼고, 시제는 오로지 현재다. 어디서부터 읽어도 상관없는 비선형非線型문자인 것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그녀가 ‘미래를 보는 능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 헵타포드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고 그 때문에 ‘변화’ 하기 때문이다. 헵타포드에게 시간은 우리처럼 한쪽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과거-현재-미래는 있지만 그것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우리는 ‘미래를 기억한다.’라고 말하지 않지만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한 루이스는 미래의 자신과 소통한다.

미래의 언어를 습득한 루이스가 한나라는 딸을 통해서 자신의 미래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이 영화는 난해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처음-가운데-끝이라는 선형적인 구조가 아니라 수시로 이어지고 돌고도는 원형적인 구조로 전개되어 보는 이를 교란시킨다. 영화에 등장하는 헵타포드어를 루이스 베이크가 머리를 싸매고 해석하는 것처럼 관객들도 영화를 보는 내내 익숙하지 않은 헵타포드식 순환 구조에 머리를 싸매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비유는 주머니에 새끼를 기르며 통통 뛰어다니는 동물을 보고 영국 선원이 원주민에게 ‘저게 뭐죠?’라고 물었을 때 ‘캥거루’라고 답했는데 실은 그것이 ‘나도 몰라.’라는 뜻이었다는 일화다. 이 일화는 허구적이지만 낯선 언어가 서로가 서로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오인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군사적 지위를 지닌 웨버 대령, 소통과 이해를 중시하는 언어학자 루이스, 수의 배열을 중심으로 물질계를 해석하는 이론 물리학자 이안이다. 이들이 이끌어가는 역할 역시도 상보적이다. 어느 한쪽의 역할에만 치우치지 않고 삼각형 구도를 이룬다. 삼발이 구조는 하나의 다리만 사라져도 존립할 수 없다.


헵타포드에게 묻기 위한 질문 “너희들은 여기에 왜 왔니?”를 습득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은 ‘너’ (you)를 이해시키는 것이다. 근원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너’와 ‘나’에 대한 이해가 없이 “너희들은 여기에 왜 왔니?”라는 질문을 할 수 없다. HUMAN.. I'm HUMAN. Who are you? 루이스가 헵타포드들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나는 인간이며 루이스라고 가르친다. 내가 인간이며 내가 루이스라는 것을 이해시켜야만 상대방도 “나는 00이라 불리며 나는 00이다”라고 비로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의미 있는 대화의 시작은 당신과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안은 헵타포드에게 ‘에봇’과 ‘코스텔로’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영화의 원제는 접속 혹은 접촉이 아닌 ‘도착’이다. 이 영화의 시작이 거대한 미확인 우주선이 지구에 도착한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우주선의 모양이 타원형의 ‘알’ 모양이라는 것에 주목해보자. 인간의 배 속에 10달 동안 잉태된 생명체 어찌 보면 인간의 자궁도 타원의 구조라 볼 수 있다. 난생을 하는 동물들의 경우를 보면 동굴 동글 탁구공 같은 알을 낳는 게 아니라 타원형의 알을 낳는다. 그것은 타원이라는 구조가 종족 보존 측면에서 구형에 비해 안정적이기 때문 일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 희귀병에 걸린 한나의 죽음에 오열하던 루이스가 마지막 장면에선 한나의 잉태. 즉 루이스의 자궁에 한나라는 미확인(?) 생명체의 도착으로 끝난다. 한나의 도착과 더불어 헵타포트는 지구를 떠난다. 어찌 보면 도착과 떠남은 장소의 상대성을 이미 품고 있다. 여기에 도착하기 위해서 그들은 어딘가에서 떠나왔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를 떠난다는 것은 거기 어딘가에 도착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헵타포드는 시간을 순차적, 인과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들의 언어에는 현재형 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은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을 두고 인과율에 의해 과거로 다시 돌아가거나 미래와 접속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시제를 생각하며 문장을 한 단어씩 써 내려가는데 비나 햅타포드는 긴 다리로 ‘한방’에 먹물을 쏘아내며 써낸다. 이 행위는 현재 시점에서 이미 미래의 일을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발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숫자들에 주목해보자. 이론물리학자인 이안은 헵타포드를 이해하기 위해 우주의 언어인 ‘수학’을 사용한다. 영화가 갈등으로 치솟을 때 그들이 남긴 메시지가 12분의 1 이란 것을 알아낸다. 지구에 도착한 우주선의 개수가 12이며 루이스의 딸이 죽은 나이도 12이다. 또 다른 숫자 18은 reset, 순환을 뜻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헵타포드의 우주선에 들어가는 시간 간격이 18시간이며, 외계인이 지구를 떠나고 나고 18개월 후 지구에서는 화합의 장이 열린다. 숫자 20은 웨버 대령이 루이스를 헵타포드가 있는 캠프로 데려가려고 왔을 때 루이스는 ‘20분만 시간을 줘요.’라고 말하지만 그는 ‘10분’밖에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한편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루이스가 중국의 생장군과 긴박한 전화통화를 할 때 이안은 ‘20초’의 시간을 벌어준다.


인류의 언어적 기원에 대해서는 바벨탑과 관련되어 있다. 신의 위치에 도전하려는 인간들을 응징하기 위해 각기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했다는 이야기, 오늘날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을 해독하려 할 때는 이미 소멸된 고대어들의 의미를 알아내야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언어적 해석. 인간의 사고 체계가 언어를 만들지만, 어떤 언어를 습득하고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사고 체계 또한 달라질 수 있다는 사피어 워프의 가설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지구라는 행성. 전 우주적으로 보면 아주 작은 행성, 그 행성 속에 ‘인간’이라는 종으로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자국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서로와 서로의 소통을 단절시키며 살고 있다. 116분의 긴 영화에서 루이스는 외계 생명체와 느리고 진중한 햅타포드식 소통을 끊임없이 이어가지만 각 국의 소식을 시시각각 알려주는 뉴스 채널은 말 그대로 전 세계 언어들이 뒤섞인 혼돈 그 자체이다. 소통은 없고 오직 자신들의 방식으로만 전달하고 이해하려는 불통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착’ 영화의 원제처럼 우리는 지금 어디에 도착해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어디에 도착해있으며 우리의 ‘도착’을 시공간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 개개인의 삶에서 ‘도착’ 이 갖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철학적인 영화다. 결국 이 영화는 우리에게 “ 너는 누구이며 왜 여기에 왔는가?”를 묻고 있다.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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