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얼마나 더 깊어져야만 높아질 수 있을까? /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젊은 여인이 있었다. 평론가는 그녀의 작품에 대해 어떤 악의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녀를 북돋아 줄 생각이었다.
신문에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실렸다
<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그녀는 평론가의 말을 별로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그녀 앞에서는 그녀의 작품을 칭찬하면서도 뒤편에서는 나지막이 ‘그녀에게는 깊이가 없어요. 애석하게도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 말을 들은 다음 주 내내 오직 깊이에 대한 생각만을 했고 두 번째 주는 다시 그림을 그리려 했으나 줄 하나 긋지 못하고 말았다. 세 번째 주는 미술서적을 탐독하고 화랑과 박물관을 돌아다녔다. 시립 박물관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 앞에서 미술교사 에게 “이 그림에 깊이가 있는지?”를 묻다가 비웃음을 당한다.
그날 이후 점점 더 이상하게 변해버린 그녀는 그림을 단 한 장도 그리지 못하였다. 그녀는 “난 깊이가 없어요.”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한때 재능을 지녔던 그녀는 영락해졌고 몸은 비대해졌으며 알코올과 약물에 찌들어갔다. 그녀의 집 여기저기에 곰팡이가 슬었다. 돈이 떨어지자 자신의 그림에 전부 구멍을 내고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는 자신은 139미터 탤레비전 송전탑으로 올라가 자살을 시도하는데 굉장한 바람이 불어서 타르 포장된 광장에 떨어졌다가 귀리 밭을 가로질러 전나무숲 속으로 떨어져 즉사했다.
스캔들을 주로 보도하는 대중지들이 한때 유망하고 미모가 뛰어난 여류화가의 죽음을 잎 다투어 싣는다.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집, 갈기갈기 찢긴 그림, 배설물 등을 기사화한다.
평론가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충격적 사건이다.... 비극의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
‘깊이가 없다.’는 말로 시작한 평론가의 비평. 그러나
그녀의 죽음 앞에, 구멍 뚫린 채 갈기갈기 찢긴 그녀의 작품에 대해 평론가는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들며.....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깊이에의 강요’라고 평한다.
같은 작품을 두고 평론가는 ‘깊이가 없다.’에서 ‘깊이를 강요한다.’로 정반대 평가를 내린다. 전도유망한 젊은 화가의 죽음은 어쩌면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평론가는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작품에 대한 평가. 평가를 통해 평론가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발언이 젊은 예술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누구든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또한 어떤 작품에 대한 다른 이의 객관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비평은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그리고 무엇인가를 평가하는 데 있어 자신의 평가가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작품에 향후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를 고민해보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
말을 하기는 쉽다. 깊이가 있다 혹은 깊이가 없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깊이는 어느 정도의 깊이인가? 그 예술가에게 필요한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깊이가 없는 높이는 높이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한동안 깊이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깊이가 없는 높이는 높이가 아니라면... 높이는 깊이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깊이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더 깊어져야만 할까? 깊이는 곧 높이이며 깊어져야만 높아질 수 있다는 역설 앞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가 우리에게 남기는 여운은 크다.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