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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을 통한 인간 운명의 보편적 진실을 말하고자 하였다

조지 클로젠의 '울고 있는 젊은이' 그림이 떠오르는 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글자 없는 첫 그림책 『우화』

도덕적인 명제나 인간 행동의 원칙을 예시하는데, 대개의 경우 우화는 보편적인 지혜를 담고 있는 경구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우화'라고 한다

또한 곤충의 우화는 번데기가 나비로 변태 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 책의 제목으로서의 ‘우화’는 전자이겠지만 나는 곤충의 ‘우화’와도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갇혀있는 상태였던 번데기가 비로소 세상을 보는 눈을 얻는 날, 자유의 날개를 얻는 날이니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이 책을 읽는 독자도 닫힌 시선, 편협한 시선이 아닌 열린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우화』는 뒷짐을 진 한 남자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단 한 줄의 문장도 없다.


다음 페이지로 넘기면 수갑을 찬 남자가 되어있거나 누군가의 현관 앞에 서서 푸른 장미를 들고 서있는 남자가 되어있다. 동일한 남자, 동일한 포즈인데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수갑인지, 장미인가에 따라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기발하고 흥미로운 상상이다.                      

우아하게 첼로를 연주하는 여자의 동작과 아이를 때리고 있는 여자의 동작, 총을 맞고 양팔을 벌리고 있는 남자의 동작과 노래를 열창하며 양팔을 벌리고 있는 남자의 동작은 같다.               

백발의 여인이 술병을 입에 들고 마시고 있고 바로 옆 페이지에는 동일한 여인이 비눗방울을 불고 있다. 술병과 비눗방울... 전자의 그림에서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보이는데 후자는 희끗한 흰머리 여인 안에 존재하는 순수한 동심이 느껴진다.    

 

원피스에 굽 낮은 구두를 신은 여인이 서있다.  한 페이지에선 우산을 펴려는 동작이고 다른 페이지에선 장총의 방아쇠를 당기려는 동작이다.  한 아이가 아래로 추락하는 장면과 같은 아이가 그네를 타는 장면.

한쪽은 목숨을 잃을 수 있을 만큼 위급한 상황이고, 다른 한쪽은 유희의 한 순간이다.

 엄마가 아이를 등에 태우고 장난감이 있는 거실에서 말처럼 기어가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선 아기를 등에 업은 동일한 포즈의 엄마가 가시철조망 사이로 위태롭게 기어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숨 막힐 듯 긴장감이 느껴진다.

가슴이 조여 오는 것, 한 편은 여유로움, 평안함, 자유, 기쁨을 다른 한 편은 분노와 슬픔, 다급함, 전쟁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전의 양면 같은 삶이다.

저자는 의도한 장치를 주고 독자들이 자유롭게 생각하도록 단 한 글자도 넣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설명도 없는 페이지에서 우리는 그림 속 인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간단한 상징을 통해 인간의 운명에 대한 보편적 진실을 말하고 싶다. 서사 전체가 열려 있어 아무런 제한 없이 자유로운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도록, 독자 개개인이 자신들의 생각으로 채울 수 있도록, 여러분을 초대한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본국 폴란드 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로 이미 권위 있는 각종 상을 수상했다. 2020년 <할머니의 자장가>로 볼로냐 라가치상 뉴호라이즌 부분에 선정됨으로써 그간 총 3번의 라가치상을 받았으며, 2018년과 2020년, 2022년 총 3번에 걸쳐 안데르센상 최종 후보로 추천되었다.     

작가가 살고 있는 폴란드는 한창 전쟁의 고통으로 삶과 죽음이 오가는 우크라이나와 접경국이다. 수많은 난민들의 아픔을 가까이 보며 다양한 감정이 섞였다. 이 책은 국가 근본주의와 증오, 인종주의에 대한 절망, 폭력과 탐욕, 적대감 속에서 작가 본인이 직접 나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좌절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비록 자신의 목소리가 아무리 작고, 세상에 크게 들리지 않을지언정,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생각의 시작점을 찍고 싶었다고 한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내용 일부 발췌- 

    


『우화』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오늘 받는 사이... 이태원에 엄청난 참사가 벌어졌다.

책을 열자마자 “ 간단한 상징을 통해 인간의 운명에 대한 보편적 진실을 말하고 싶다.”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인간 운명에 대한 보편적 진실이라니.     

희생자의 대부분은 핼로윈데이를 이태원에서 보내러 온 젊은이들이었다

좁은 골목, 주최 측이 없다 하여 어느 누구도 통제하지 않았다. 희생. 참사, 고통과 절규.....

문득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책에 그림들을 추가하고 싶었다     

꽃을 들고 핼러윈 장식을 한 채 어딘가로 향하는 젊은이들의 등과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시신이 되어 드러누운 등.     

거실의 도미노 놀이와 무너지는 인간들의 도미노....

가슴 아픈 일이다. 이보나의 흐미에레프 스카의 그림책이 가슴을 후벼 판다.

어쩌면 이리도 지금 상황에 꼭 어울리는 책일까.

폴란드인인 그녀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고통을 안다. 그러하기에 인간 운명에 대한 보편적 진실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한 권의 그림책에 담아낸 것이리라.     

인간의 운명... 운명에 대한 서사...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라는 도종환 시인의 시가 있다.     

오늘은 그 시가 다시 읽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뤄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히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 도종환-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읽던 그의 시가 오늘은 맨 마지막 부분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에서 더 읽어 내려갈 수가 없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먹먹하고 가슴이 아려온다.

우리는 지친 표정으로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어디론가 흩어질 것이다.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 가는 서글픈 세상 속에서...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책을 읽고 자판을 두드리고 골목길을 걸어갈 것이다/ 려원          


<사람학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지음

나무 십자가 앞,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생을 정화하려는 처절한 참회의 몸짓처럼 보인다.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삭막한 곳, 장소를 특정할 수 없는 이곳에 어둠이 내려앉고 있지만 어둠은 아직 여인의 몸을 가리지 못한다.

모태의 태아처럼 대지에 웅크리고 있다. 여인을 품은 대지는 여인을 위한 자궁이며 지금 여인은 손과 팔과 무릎 꿇은 다리, 구부러진 등, 온몸으로 모태의 자궁벽에 참회록을 쓰고 있다.

내부로부터 솟구치는 울음이 잠든 대지를 전율하게 한다.    p 134 참회록 쓰기 좋은 날  중에서



 어떤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헤집고 지나간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인간의 운명이란 것이 얼마나 알 수 없는 것인지를.....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는 것은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바쁘다는 핑계를 대어가며. 잘 살기 위해서라고 안위하지 않았던가.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한 채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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