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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란 것을 생각하면서 갑자기 무서워졌다.루쉰<고향>

막연하고 아득한 희망을 품는 것은 늘 두렵다.

희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갑자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달라고 했을 때 나는 그를 속으로 우습게 여겼다. 그가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고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 역시 내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우상이 아닌가? 단지 그의 희망이 보다 현실적이고 절박한 것인 반면, 나의 희망은 막연하고 아득히 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무의식 중에 눈앞에 펼쳐진 바닷가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짙은 쪽빛  하늘엔 동그란 황금빛 보름달이 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땅 위에 난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에는 길이란 게 없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고향』끝 부분


루쉰의 『고향』은 서술자인 내가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그곳을 완전히 떠나기 위해 어머니와 짐 정리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느 해 설날 자신의 집에 망월(명절에만 잠시 일하는 머슴)로 온 ‘룬투’와의 과거를 회상한다. 기억 속 룬투는 가슴에 반짝이는 은 목걸이를 찬 다부진 소년이었고, 건강하고 재주가 많고 총명한, 가슴에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소년이었다.

이사 소식을 듣고 룬투가 찾아오기로 한날 나는 룬투를 다시 만난다는 기쁨에 지난날의 추억을 되새기며 설레었지만 룬투는 그 옛날의 룬투가 아니었다.

룬투의 첫마디는 “나으리”였다.

 거북 등처럼 갈라진 손바닥과 그을린 얼굴, 골이 깊게 팬 주름. 삶에 찌든 전형적인 농사꾼의 모습이었다. 

나와 룬투 사이에 두꺼운 벽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하지만 룬투가 데려온 그의 다섯 번째 아이 쉐이성과 나의 조카 홍얼이 어린 날의 자신들처럼 허물없이 어울리는 것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랜다. 

 “고향 산천도 점점 멀어졌다. 아무 미련도 남지 않았다”

룬투는 향로와 촛대를 바라는 현실적인 희망을 품고 서술자인 ‘나’는 아득한 희망을 품는다.

멀어져 가는 고향을 바라보며 세대 간의 단절이 끝나기를 기원한다.    

 


루쉰의 『고향』이라는 작품보다 더 유명한 말이 ‘희망’에 대한 그의 정의 부분이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땅 위에 난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에는 길이란 게 없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유명한 문구 보다도  “희망이란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라는 대목에 더 마음이 끌렸다.

‘희망’을 품는 일이 왜 무서운 일이 될 수 있을까?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품는 ‘희망’과 보이지 않는 것을 품는 ‘희망’

희망의 깊이와 폭과 결이 다르지만 ‘희망’은 ‘희망’이다.

두려워지는 것은 내가 희망을 품는 것과 별개로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들이 쉬워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을 품기는 쉬우나 그 희망을 현실화하는 일이란 늘 두렵기 때문이다.


룬투는 무려 30년 만에 만난 옛 친구를 ‘나으리’라고 부른다.

그의 희망은 굶어 죽지 말아야 한다는 바람, 이사 가려고 싸 둔 짐에서 그릇이라도 훔쳐서 팔아먹으려는 절박함, 그러면서도 촛대와 향로와 재를 원하는 마음으로 압축된다.  룬투에게 그는 옛 친구가 아닌 나으리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희망은 무엇일까?

나는 '희망'이란 말에 아득한 생각이 먼저 든다. 언제부터인가 '희망'을 '희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희망하든 희망하지 않든 세상은 어김없이 자기만의 순환을 하고 나는 그 순환 속에 떠밀리듯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본디 길이란 없었다. 걸어가는 이가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마음에 길을 내는 것은 곧 희망을 품는 일이다.

자꾸 어딘가로 마음이 이끄는 곳을 향해 걷다 보면 내가 바라던 곳에 닿아있을까.     

희망을 탐하기보다 그냥 현재에만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희망’은 루쉰의 『고향』에 등장하는 ‘나’의 것처럼 아득히 멀고, 보이지 않기에 나는 그냥 ‘룬투’처럼 보이는 현재만을 살기로 했다./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 려원 지음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망은 잠자고 있지 않은 인간의 꿈'이라고 했다. 꿈을 꾸는 것은 잠을 자는 동안에만 가능하지만 희망을 꾸는 일은 잠을 자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다.... 돌아보면 희망에 주린 사람처럼 늘 희망을 탐하며 살았다.... 

'희망이란 바로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 이 아닌가.

 p 245



시간이 흐를 수록

한해 두해 세월의 켜가 내려앉을수록

희망은 두려운 단어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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