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어떤 자는 달리고, 어떤 자는 웅크린다. 새해 새날.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새해 새날 아침이다. 

보들레의 시로 아침을 연다.

     

떠나야 할까? 머물러야 할까?

머물 수 있다면 머물러라, 떠나야 한다면 떠나라.

어떤 자는 달리고, 어떤 자는 웅크린다.

늘 지키고 있는 불길한 적 ‘시간’을 속이려고

아아! 쉼 없이 달리는 자들이 있다.      

              -보들레르 <여행> 중에서 -

어떤 자는 달리고 어떤 자는 웅크릴 시간이 시작되었다. 1년의 레이스. 출발점에 서 있다.

우리의 등을 떠밀고 있는 시간의 얼굴, 설레면서도 불길하고 두려운 시간을 속이려고 쉼 없이 달리는 자들이 있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쉼 없이 달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침이다.     


달리지 않아도 돼, 쉬어도 괜찮아,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야. 방향이야.... 내려놓아도 좋아...

흔히 듣는 말들. 지친 마음을 다독이기 위한 주술 같은 말들이다.

‘괜찮다’는 마법의 말들..     

지금은 새로운 해의 아침.......... ‘괜찮다’는 말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살다 보면 세상 일이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괜찮아’ 지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의지와 무관하게 거침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를 격려하는 작은 목소리였을 뿐.     

니체의 ‘초인’까지는 아니더라도 항상 극복해야 할 것들은 내 안에 있었으니까.

극복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었고 내 안에 있는 웅크린 것들이었으니까.     


지난해의 눈이 여전히 길가에 있다. 17년 만의 폭설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아파트 앞 도로를 포클레인까지 동원해 제설작업을 했음에도 눈은 녹지 않고 있다. 포클레인의 거친 손이 할퀴어버린 눈은 순백의 눈이 아닌 회색의 눈이다.

옥탑방 베란다에 쌓인 지난해의 눈들도 서서히 자기만의 속도로 녹아가고 있다. 어떤 무력을 동원하여 쓸어내고 싶지는 않다.  그 눈들 사이 혹독한 겨울밤을 보낸 장미 넝쿨이 지치고 힘든 표정으로 버티고 있다.

새해가 되었다. 그들에게도.

강해지고 단단해졌을 장미 넝쿨의 뿌리.... 밤새 흔들리던 잎사귀들...

그곳에 있지만 웅크린 자의 모습이 아니다.

쉼 없이 달리는 자의 모습이다. 화분이라는 작은 우주 속에서도 그들은 머리를 휘날리며 뾰족한 가시를 세우고 세상 속으로 달리고 있다.     


새해 새날.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다. 

여전히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슨 유명한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적어도 가슴 안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을 붙잡아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귓가에 남아있던 젊은 아버지의 타자 소리처럼....... 아버지의 새벽처럼, 아버지의 시간처럼....

나는 새해 아침,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무엇보다 거룩한 일을 하기 위함이다. 

웅크리고 싶지 않다는 다짐이고 ‘괜찮다’라는 말 뒤에 숨고 싶지 않은 마음이기도 하다. 

'처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야 하는 아침이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오늘의 해는 지난해의 눈 위로 내려앉아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려원 산문집/ 수필과 비평사

이른 새벽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그토록 맹렬하게 생의 자판을 두드렸던 것일까

아버지가 듣고 싶었던 생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동트기 전 새벽의 여명 속에서 들려오던 타자 소리는  숲에서 들려오는 북소리 같았다.

하얀 종이 위에 날렵한 글자쇠가 튀어나와 생의 악보를 그렸다. 타자소리는 가끔 절박하게도 들렸고 단조롭게도 들렸고 때로는 거친 힘이 들어간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아버지 자신의 생을 위한 거룩한 연주였다.... 

아버지 자신의 운명교향곡 같은 것이었다... p295


- 제4부 존재의 변주곡 -  

'아버지의 타자 소리는 생의 걸음소리' 중에서 

작가의 이전글 물의 길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아바타 2 <물의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