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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코미디언과 늙은 광대

웃음과 눈물 사이 버둥거리는 세상의 민낯을 마주하기

늙은 코미디언 / 문정희   

  

코미디를 보다가 와락 운 적이 있다

늙은 코미디언이 맨 땅에 드러누워 ‘

풍뎅이처럼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

그만 울음을 터뜨린 어린 날이 있었다

사람들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코미디를 보고 운다고

그때 나는 세상에 큰 비밀이 있음을 알았다

웃음과 눈물 사이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어두운 맨 땅을 보았다

그것이 고독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그런 미흡한 말로 표현되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 맨 땅에다 시 같은 것을 쓰기 시작했다

늙은 코미디언처럼

거꾸로 뒤집혀 버둥거리는

풍뎅이처럼          


문정희의 시 <늙은 코미디언>에서 시적화자는  늙은 코미디언이 맨땅에 드러누워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터뜨린다. 어린 날 세상의 비밀을 이미 알아버린 듯... 웃음과 눈물 사이 살기 위해 맨땅에서 버둥거리는 것아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고독이라거나 슬픔이라거나 그런 단어마저도 어울리지 않는 삶이 온다. 언젠가는...

몸이 뒤집혀 버둥거리는 풍뎅이처럼.


어린 시절  몸으로 웃기는 코미디언들이 인기를 끌던 시대가 있었다. 몸으로 말하는 사람들, 일부러 바보 연기를 하는 사람들. 유튜브도 없던 시대, 텔레비전이 유일한 오락의 수단이었던 시대에 사람들은 화면 속 바보 연기를 하는 늙은 코미디언에게서 삶을 위로받았다.

어린 내 눈에는 하나도 웃기지 않는 바보 연기를... 어눌하게 말하고 데굴데굴 구르는 몸짓, 바보스런 눈짓.

어른들은 왜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렸던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들만큼 나이를 먹어버린 나는.... 그들이 왜 바보상자라 불리는 텔레비전에서 바보 연기를 하는 코미디언을 보고 웃고 있는지.... 그 시간이 아니면 별로 웃을 일이 없다는 것. 삶이란 억지로라도 웃지 않으면 사실 웃을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온몸을 버둥거리는 풍뎅이의 절박함은 관심에도 없고 그 곤충이 얼마 만에 몸을 뒤집는지 카운트 다운을 하던 속없던 어린 시절..... 그 모든 것이 죄가 되는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이제 생각하면...

몸을 뒤집으려 맨땅에 발버둥을 치는 늙은 풍뎅이가 될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것을 어리석게도 나는 이제야 안다.      



샤를 보들레르의 시 <늙은 광대>     


어디서나 휴가 중인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붐비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광대들, 곡예사들, 동물 조련사들, 유랑행 상인들이 그 해의 불경기를 만회하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온 성대한 축제의 시기였다. (...)

진짜  파리 시민인 나로서도 이 성대한 시기를 모든 천막 상점들을 빠짐없이 구경하며 지나게 된다. 사실 이 천막 상점들은 서로 무서운 경쟁을 벌이면서 빽빽 소리치고, 고함치고, 으르렁거린다. 금관악기의 폭발음, 불꽃 터지는 소리들이 뒤섞여있다.

어릿광대들과 조크리스 같은 희극적 인물들은 바람과 비와 햇살에 그을린 메마른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스스로 과장된 연기애 자신만만한 코미디언들의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몰리에르의 희극처럼 경직되고 무거운 희극적 재담과 농담을 쏟아내곤 했다.(...)

모든 것이 빛, 먼지, 고함, 기쁨, 소란이었다. (....)

끝자리에서, 줄지어 늘어선 천막 상점들의 맨 끄트머리에서 마치 자신이 이 모든 호화판에서 유배된 사람이 되어 부끄럽다는 듯한 불쌍한 광대가 눈에 띄었다. 그는 구부정하고 노쇠하고 늙어빠진 인간 폐물의 모습으로 그의 초라한 천막의 말뚝에 기대어 있었다. 그 초라한 집은 미개한 야만인의 집보다 더 비참한 모양이었고, 연기가 나면서 녹아내리는 두 개의 촛불들이 궁핍한 내부를 환하게 비추었다.

  어디서나 즐거움, 돈벌이, 방랑이 있었고 어디서나 다음 날을 위해 빵이 필요하다는 믿음이 있었고, 어디서나 열광적인 생명력의  폭발이 있었다. 여기에서 절대적 빈곤, 설상가상으로 희극적인 누더기를 걸친 괴상한 옷차림의 초라함은 그 궁핍함으로 인해 주위와 대조를 이루었다.

비참한 광대는 웃지도 않는다. 그는 울지도 않았고, 춤을 추지도 않았고, 몸짓을 하지도 않았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노래를 부르지도 않았고 즐거움이나 비통함을 나타내지도 않았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만사를 포기하고 단념한 모습이었다. 그의 운명은 끝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혐오스러울 정도의 가난한 집에서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에 멈춰 있는 군중과 빛의 움직이는 물결을 향해 얼마나 깊이 있고 잊을 수 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는가. (...)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불행한 사람에게 악취 풍기는 어둠 속에서, 너덜너덜한 커튼 뒤에서, 어떤 신기한 재주나 경이로운 묘기를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엄두가 나지도 않았다. 고백하건대 나의 이러한 심증이 독자를 웃게 만들지라도 그만큼 그에게 모욕을 줄까 봐 두려웠다. 결국 그 앞을 그대로 지나면서 그의 가설무대 위에 약간의 돈을 놓아두고 그가 나의 의도를 알아차리기를 기대하면서 알 수 없는 소란으로 몰려다니는 엄청난 군중의 물결에 휩쓸려 그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 광경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거기서 느낀 나의 갑작스러운 고통을 분석해 보다가 방금 내가 본 사람은 과거에 인기를 누렸다가 자기의 시대가 지난 후에도 살아 있는 늙은 문인이었다는 것을, 친구도, 가족도, 자식도 없이 궁핍한 생활과 대중의 배반으로 타락한 늙은 시인이었다는 것을, 잊기 잘하는 대중이 이제는 더 이상 그의 천막으로 들어가 구경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샤를 보들레르의 시 <늙은 광대>      

축제의 한 복판, 불꽃과 금관악기 소리와 사람들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뒤범벅된... 파리 거리 

과장된 연기를 하는 광대들의 천막을 돌며 누군가는 돈을 쓰며 웃고 누군가는 돈을 벌어 웃는다. 모든 것이 빛, 먼지, 고함, 소란, 유희로 대변되는 순간. 

그런데 맨 끄트머리... 아무도 찾지 않는 천막에서 늙은 광대를 발견한다

“이 모든 호화판에서 유배된 사람이 되어 부끄럽다는 듯한 불쌍한 광대가 눈에 띄었다. 그는 구부정하고 노쇠하고 늙어빠진 인간 폐물의 모습으로 그의 초라한 천막의 말뚝에 기대어 있었다. 그 초라한 집은 미개한 야만인의 집보다 더 비참한 모양이었고, 연기가 나면서 녹아내리는 두 개의 촛불들이 궁핍한 내부를 환하게 비추었다.

  어디서나 즐거움, 돈벌이, 방랑이 있었고 어디서나 다음 날을 위해 빵이 필요하다는 믿음이 있었고, 어디서나 열광적인 생명력의  폭발이 있었다. 여기에서 절대적 빈곤, 설상가상으로 희극적인 누더기를 걸친 괴상한 옷차림의 초라함은 그 궁핍함으로 인해 주위와 대조를 이루었다."

 빵을 위한 믿음과 유희가 절정에 이르는 축제의 한 복판 늙은 광대는 인간 폐물의 모습으로 말뚝에 기대어 서있다. 견딜 수 없는 참혹함에 광대의 천막 앞에 돈을 놓고는 도망치듯 나온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생각한다.

저 늙은 광대가 한때는 유명한 시인이었음을...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추레한 늙은 광대로 남겨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모습이 또한 언젠가 자기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늙은 광대>와 <늙은 코미디언>  둘은 모두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어야 빵을 얻을 수 있다.

그들에게 과장된 웃음이란 고통이 아닐까... 감정 노동의 고통...

젊은 광대와 젊은 코미디언은 그 과장된 연기를 감쪽같이 해낸다. 관객이 그의 눈에 비친 이슬 한 조각을, 그의 입꼬리에 걸친 냉소 한 조각을 알아차릴 새도 없이... 완벽하게, 능수능란하게...     

광대와 코미디언...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들 또한 우리 생에서 저마다의 광대이며 코미디언이다. 과장된 연기가 필요한 시간... 맨땅에 드러누워 버둥거릴 풍뎅이가 되지 않기 위해...

버려지지 않기 위해 어떤 몸부림을 쳐야 하는 시간...

그것은 어떤 슬픔이나 어떤 고독이나 어떤 희열이나... 그런 얄팍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픈 것들이다.      


나는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다. 특히나 오락프로그램은 전혀 보지 않는다.

말의 유희, 진정성 없는 말의 유희... 차라리 온몸으로 바보 연기를 하던 그 어린 날의 코미디언의 모습이 더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을까...

그것을 보며 어른들은 웃었고... 어린 나는 문정희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처럼 심각해졌지만...

어른이 된 나는 차라리 그 온몸으로 바보 연기를 하던 그들이 그리워진다.

천문학적  급여를 받는... 소위 잘 나가는 개그맨들이 나와 공허한 말의 유희를 던지며 자기들끼리 웃고 낄낄대는 모습은 견디기 어렵다... 물론 그 프로그램을 통해 삶을 재충전하는 어른 광대, 어린 광대들도 많이 있겠지만....... 바보 몸짓이 주는 서러움보다 말짓이 주는 공허함이 싫어진다.

조금은 아프다는 생각이 든다. 시를 읽는 내내 늙은 코미디언과 늙은 광대가 맨 땅 위에서 버둥거리는 풍뎅이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떠오르는 것이...

또한 그 모습이 남의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3월의 초입에 나는 <늙은 코미디언>과 <늙은 광대>를 읽는다. 쓸쓸하고 스산하고 애잔하고 아픈 시를 읽는다. / 려원


< 사람학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선정 도서

연극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비틀거릴 것이고 

내 상대역이 묻는 질문에 해야 할 대답을 잊어버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멍청하게 서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있어도 있지 않은 부재... 


/ 당신의 연극은 현재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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