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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언가를 찾는 일/ <더 디그>

“두려움과 타협을 바탕으로 연극을 만들 수 없다. 논쟁이 없다면 예술 또한 없다. ”     


<더 디그 The Dig>는 1939년 영국 서퍽(Suffolk)의 서튼 후(Sutton Hoo)에서 앵글로색슨(Anglo-Saxons) 선박 매장 발굴을 배경으로 하는 사이먼 스콘 감독이 제작한 영화다. 2차 대전 발발 직전이던 영국 동부 해안 인근의 시골 마을 서퍽(Suffolk) 서턴 후(Sutton Hoo) 지역.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존 프레스턴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고고학 발굴에 관심이 컸던 이디스 프리티는 이스트 앵글리아 (East Anglia) 지역에 위치해 있는 서퍽에 넓은 소유지를 가진 프리티 가문의 미망인이다. 서퍽은  바이킹들이 영국으로 들어올 때 주요 상륙 지점이었기 때문에 바이킹 유적이 많이 발굴되는 지역이다. 유물이 많은 도굴도 많아서 군데군데 내려앉은 땅이 많다. 

이디스는 넓고 큰 여러 개의 둔적 중 유난히 동 서로 긴 구조를 띤 둔덕에 무언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임신을 바라는 동네여자들이 둔덕 위로 올라가 누워있곤 했다. 둔덕을 제대로 발굴하고자 배질 브라운(Basil Brown)을 고용한다. 브라운은 가난 때문에 열두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했다. 발굴현장을 수십 년 전전하면서 땅파기 전문가가 되었다. 브라운은 서퍽지방에서 대대로 농부였던 집안 내력 탓인지 서퍽의 땅 한 줌만 가지고도 누구 집 땅의 흙인지를 알아맞힐 정도였다.



브라운은  ‘이스트 앵글리아’라는 명칭이 앵글로색슨에서 유래된 만큼 이곳 어딘가에 바이킹 유적이 아닌 앵글로 색슨족의 유적이 묻혀있을 것으로 믿었다. 아무도 학력이 일천한 그의 말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그는 단지 땅을 잘 파는 전문 일꾼으로 간주되었다.  집요하게 작업을 하던 중 깊게 파놓은 흙의 지반이 무너져 흙더미 속에 깔려 목숨을 잃은 뻔하였지만 그 순간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진술한다. 돼지의 등뼈처럼 굽은 이 땅은 천년 간 경작되었으며 동 서로 길게 무언가가 묻힌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날, 선박 제작에 쓰이는 쇠로 만든 대갈못이 발굴되는데 바다가 강에서 꽤 먼데다 지형적으로 높은 언덕이어서 배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누군가 저 아래 강에서 배를 짊어지고 언덕으로 올라와 배를 파묻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배를 운반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의 수도 어마어마했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권력자의 사후 세계를 위한 장례 의식의 일부였고 바로 이 둔덕은 앵글로 색슨족 권력자의 무덤인 셈이다.  

   

배질 브라운(실제 인물)과 랄프 파인즈
케리 멜리건과 이디트 프레디 (실제 인물)



배 앞머리가 발견도면서 브라운의 흥분과 기쁨은 최고조에 이르고 부장품이 있을 가능성에 기대감이 컸다,  역사상 처음으로 6세기 앵글로색슨의 부장 유물이 발굴될 찰나, 지역 입스위치 박물관을 비롯 언론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대영박물관에서도 유물 발굴을 위해 캠브리지 대학의 저명한 고고학자 찰스 필립스를 파견한다. 찰스는 인근을 중요 국가유적 발굴지역으로 선포하고 국가 공무국의 지휘 하에 발굴이 진행될 것이므로 사사로운 발굴을 중단하라고 명령한다.

발굴 작업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게 된 브라운은 짐을 꾸려 집으로 돌아간다. 일생일대의 역사적 발굴을 눈앞에 두고 배제된 절망을 느끼는 그에게 아내는 “발굴은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가 위한 것”이라며 단순히 흙을 나르는 업무만 주어지더라도 지금 당신이 왜 그곳에 남아있어야 하는지 당신이 더 잘 알 것이라고 말한다.

떠나는 그의 뒤를 자전거를 타고 먼 거리를 쫓아온 미망인의 아들 로버트의 마음을 생각해서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고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해낸다. 


메로빙거 왕조의 금화가 발굴되고 엄청난 규모의 부장품이 쏟아져 나온다. 브라운의 예측대로 그 배는 앵글로색슨족의 것이었고 영국의 역사가 다시 써지는 순간이었다.     

한편 심장 판막의 손상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프리티 부인은 최초 발굴자 베질 브라운의 공로를 인정하여 발굴자 명부에 올려주기를 요구하는 조건으로 발굴 유물 전부를 대영박물관에 기증하지만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최근에야  공식적으로 공로가 인정되었다고 한다. 



죽어가는 엄마를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우는 어린 소년 로버트를 위해 브라운은 엄마와의 마지막 이별을 위한 이벤트를 기획한다.

“왜 저는 엄마를 영원히 돌보는 일에 실패하는 거죠.”

“우리는 모두 실패한단다. 매일...”

“누구나요?”

“그래. 세상에는 절대 해 낼 수 없는 일들이 있어.”


6세기 앵글로 색슨 왕의 거대한  배, 오크 목재로 된 27미터의 긴 배, 왕의 무덤이 되었던 그 배안에 이불을 깔고 엄마와 함께 달을 바라본다.

왕비는 저 먼 나라에 있는 왕에게로 돌아가야 하지만... 왕비는 그녀의 아들이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을 바라보고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로버트의 이야기에 프리티는 눈물을 흘린다.

     


서턴 후 유적지의 모든 발굴이 이루어지고 성대한 관심을 받은 뒤 이디스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물을 흘린다... 발굴의 성과가 엄청나서도 아니고 영국 역사를 앞당겨놓은 감격도 아니었다.     

“저 유물들은 세월이 흘러도 남아있는데... 우린 죽어요... 우린 부패해요. ”

“인간이 최초의 손자국을 동굴 벽에 남긴 순간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언가의 일부가 되었죠. 그러니 정말로 죽은 게 아니죠.”     

동굴벽에 남긴 누군가의 손자국, 그 손자국을 남긴 이는 세상에 없을지라도 그 순간부터 그는 영원히 남아있는 것이라고 배질은 말한다.          


영국과 독일의 전쟁이 시작될 무렵 수많은 젊은 이들이 전쟁터로 징집된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뉴스에서는 암울한 소식이 이어진다. 뉴스에서는 전쟁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에게

“ 할 일을 계속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멘트가 이어진다.

저마다의 할 일을 계속하는 일..     

거대한 배가 누워있는 서턴 후의 유적지도 전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존되기 어렵다.

이디스 부인은 세상을 떠나고 베질 브라운은 공격용 전투기가 하늘을 날고 있을 때 나뭇잎을 거대한 배 위로 켜켜이 깔고 긁은 삼베로 촘촘히 덮는다. 퍼내었던 엄청난 규모의 흙을 다시 부어서 거대한 구덩이를 메우고 처음과 같은 규모의 둔덕을 만드는 일... 바로 그 일이 배질 브라운이 해야 할 마지막 과업이었다.

DIG의 끝은 파는 것. 유물을 발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원래처럼 복구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한부로 죽어가는 이디스는 이미 오래전 죽은 이의 무덤을 파헤친다.

이미 다가오는 죽음 앞에 마지막으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지속한다.

로버트는 엄마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지속하고 브라운은 월세나 근근이 내며 평생 땅이나 파는 사람으로 기억될까 두려웠지만 발굴에 대한 끝없는 열정으로 발굴을 지속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흔적 없이 사라진다.

폼페이의 유적이든, 이집트 투탕카멘의 무덤이든. 신라 고분 속 황금 귀걸이든..

부장품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남아 그 시대를 알려주지만 정작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은 부재하다. 

존재하는 것들로 부재하는 것들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     

삶도 그러하다. 결국은... 잊히지만 잊히지 않는 것이다.

잊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해도 언젠가는 잊히겠지만...

잊힌다고 해도 완전히 잊히는 것은 아니다.


내 인생을 위해 또 무엇을 파내려야 할까..... 잊히지 않기 위해서..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지음/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묻지 말라. 그것은 금지된 것.....

길고 먼 희망을 짧은 인생에 맞추어 줄여라.

  우리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질투 많은 시간은 이미 흘러갔을 것. 

오늘을 잡아라. 내일을 최소한만 믿으며..... 


오늘을 잡아라.

내일을 최소한만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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