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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와 안식이 나란한 시간.
어떤 부재가 찾아오는 날

부재한 것들이 존재하는  날들, 포개어지는 날들 그리고 나란한 날들

< 소면 >     


당신은 소면을 삶고

나는 상을 차려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한 살구나무 아래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 이 집에 있어 온

오래된 나무 아래서

국수를 다 먹고 내 그릇과 자신의 그릇을

포개 놓은 뒤 당신은

나무의 주름진 팔꿈치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깐일 것이다

잠시 후면, 우리가 이곳에 없는 날이 오리라

열흘 전 내린 삼월의 눈처럼

봄날의 번개처럼

물 위에 이는 꽃과 바람처럼

이곳에 모든 것이 그대로이지만

우리는 부재하리라

그 많은 생 중 하나에서 소면을 좋아하고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하던

우리는 여기에 없으리라

몇 번의 소란스러움이 지나면

나 혼자 혹은 당신 혼자

이 나무 아래 빈 의자 앞에 늦도록

앉아 있으리라

이것이 그것인가 이것이 전부인가

이제 막 꽃을 피운

늙은 살구나무 아래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이상하지 않은가 단 하나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

두 육체에 나뉘어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영원한 휴식인가 아니면

잠깐의 순간이 지난 후의 재회인가

이 영원 속에서 죽음은 누락된 작은 기억일 뿐

나는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경이로워하는 것이다

저녁의 환한 살구나무 아래서     

                                      류시화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저녁의 환한 살구나무 아래서 나와 당신이 소면을 먹는다.

이사오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환한 살구나무 아래서....

그릇을 포개어 넣고 당신은 나무의 주름진 팔꿈치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이곳에 모든 것이 그대로이지만 살구나무 아래 소면을 먹던 당신과 나는 언젠가는 부재하리라

그 많은 생, 생의 어느 구비에서 마주쳐 함께 걸어온 우리는 몇 번의 소란스러움이 지나면 나 혼자 혹은 당신 혼자 환한 살구나무 아래 빈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있으리라.    

류시화의 시 <소면>을 읽다가 육호수의 < 나란히>란 시를 떠올린다     


< 나란히 >

     

소반 위에 

갓 씻은 젓가락

한 켤레

나란히 올려두고

기도의 말을 고를 때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안식이 나란하고

마주 모은 두 손이 나란하다     

나란해서 서로 돕는다     

식은 소망을 데우려 눈감을 때

기도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반쪽 달이 창을 넘어

입술 나란히 귓바퀴를 대어올 때     

영원과 하루가 나란하다      

요람에 누워 잠드는 밤과

무덤에 누워 깨어나는 아침     

포개어둔다

                          육호수『영원금지소년금지천사금지』2023 문학동네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안식이 나란한 시간

소반 위에 젓가락을 나란히 놓는다. 영원과 하루도 나란한 것.    

누워잠드는 밤과 무덤으로부터 깨어나는 아침.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이 영원 속에서 죽음은 누락된 작은 기억일 뿐”일까

죽음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일 뿐이다.


나란히 무언가를 놓아두는 일.

식은 소망을 냄비에 넣고 데워보는 일.

장자의  '호접몽'처럼... 나비였던 본래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     


시간이 흐를수록... 어떤 공허와 부재감이 커진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은 그래도 용감하였던가.

결핍이란 결코 채워질 수 없음을 느껴가는 요즘은 용감하지 못한 것일까.     

나란히 있던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 포개어지는 것이다. 

영원한 것이든 순간의 것이든

욕심을 내는 것이든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든

열망이든 욕망이든..... 나다운 것이든 나 아닌 것이든...


베란다의 장미 화분. 지난겨울 폭설에 죽은 것처럼 있던  장미에 새 잎이 나고 꽃봉오리가 맺혀있다.

죽음의 기억을 이기고 다시 살아온 것인가. 부재하던 것들이 존재한다. 

저 장미들은 여전히 용감한 장미가 분명하다. 

제 안에서 들려오는 생의 맥박소리에 어김없이 제 할 일을 하는... 저 장미들은...


아침 비가 내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그렇게 많은 비는 아니다.

여전히 두꺼운 이불을 덮은 채...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아침..

빗소리가 시처럼 촉촉했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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