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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음악이 멈춘다

미하엘 하케네 감독 <아무르> 

음악이 멈춘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2012년 영화 <아무르>는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합작 영화다.     

 2012년 제65회 칸 영화제에서 공개되면서 극찬을 받고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2013년 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각본상, 외국어영화상 5개 부문에 후보에 올랐고,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였다.

80대의 음악가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실제로 80대의 배우가 자기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친다.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2시간의 영화 안에 압축시켜 놓았다.

     

영화의 첫 장면은 소방관들이 코를 막으면 집안 창문을 열어젖히고 테이프로 밀봉된 문을 뜯어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푸른 원피스를 입고 신발을 신고 머리 주변에는 꽃이 놓여있는 안느의 모습....

사체가 된 안느가 두 팔을 가슴에 놓고 누워있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첫 장면에 이어지는 장면은 샹델리제 극장에서 열린 제자의 연주회에 간 조르쥬와 안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연주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피아노 소리와 박수소리를 들려주고 카메라는 객석을 꽉 채운 수많은 관객들을 보여준다.

그중 조르쥬와 안느가 있다. 안느의 제자 알렉산드로의 연주를 보고 흐뭇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데 현관 문이 누군가 손을 댄 것 같은 흔적이 있다.

소리들. 현관문을 여는 소리와 연주소리, 수돗물 소리, 샤워기 소리.... 발걸음 소리...

“오늘은 유난히 예쁘다고 내가 말했던가”

“무슨 소리야.   당신 뭐 잘못 먹었어”

안느가 이상해진 건 바로 그 밤부터였다. 새벽 멍하게 앉아있는 안느의 모습은 낯설었고 식사 중에도 다른 곳을 응시하는 안느 모습에  조르쥬는 무언가 이상이 생겼음을 감지한다.

“안느 대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경동맥이 막혀있어서 수술이 불가피했지만 수술 후 돌아온 안느는 오른쪽이 마비되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조차 없다. 연주회도 외출도... 함께 걷는 일도..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 일도... 불가능해졌다.

아주 사소한... 너무도 당연한 일들이 이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병원에서 돌아온 안느는 조르쥬에게 두 번 다시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구한다


안느가 퇴원 후 제일 먼저 찾은 책은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오스트리아 첼리스트 겸 지휘자)였다.      

지인의 장례식장에 다녀온 조르쥬는 마음이 더 착잡하다.. 누군가가 장례식에 맞지도 않는 노래를 틀었고.. 사람들은 킬킬 댔으며...  고인의 유골함이 파놓은 구멍 안으로 들어가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웃는 이들까지 있었다고... 안느에게 말한다.     

일주일에 3일을 간병인을 쓰고 의사와 간호사의 정기적 도움을 받지만 조르쥬는 점점 지쳐간다.     

제자 알렉산드로의 깜짝 방문. 그는 휠체어에 앉은 안느의 모습을 보고 착잡한 심정에 젖는다.

늙으면 그럴 수 있다는 말로 제자를 위로 한다.

“선생님은 제게 혹독하셨지요. 12살 때였어요, 바가텔을 끊임없이 연주시키셨어요”

“그래, 지금 다시 바가텔 G단조를 연주해 줄래.”

“다 잊어버렸을 거 같은데요. 한번 해보죠.”

베토벤의 바가텔 g-minor... 이곡의 의미는 무엇일까

지극히 변화 없는 단조로움이 특징이었다.

피아노를 배우는 이들은 금세 질려버릴 것 같은 단조로움. 그러나 그 단조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단정하고 반복적인 선율. 그 안에 숨은 정체 모를 불안감.

흐트러짐 없는 일상, 우아하고 아름다운 노부부의 일상, 그러나 불안감이 스며든.....           


앙상블 단원인 딸 에바는 하루하루 달라지는 엄마의 모습에 격앙한다.     

딸은 점점 나빠지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이대로 둘 수 없다고 말하지만 

조르주는 “점점 나빠질 테고... 그러다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라고 담담히 말한다.

열린 창문으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먹이를 쪼아 먹는다.

슈.... 슈... 비둘기를 창밖으로 내몰고 창문을 닫는다.     

식사 도중 안느는 조르쥬에게

앨범을 가져와 달라고 한다. 흑백 사진 속 자신과 남편의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 인생은 정말 길어... 너무 길어.”라고 말한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아내를 바라보는 조르쥬의 마음은 착잡하다.

그녀를 예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조르쥬는 침대에 누운 안느를 보며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고...

거실의 겨자색 의자에 앉아 슈베르트의 즉흥곡을 들으며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안느가 연주하던 모습을 회상한다.         

 

“앞으로 더 나빠지기만 할 거야. 왜 내가 우리를 괴롭혀야 해. 이렇게 더 살기는 싫어”     

전동휠체어로 바꾸고, 재활운동도 하지만...

안느는 또 다른 증세가 추가되었다.

언어장애로 대화마저 불가능해졌고 대소변을 가리는 일도 어려워 침대 시트가 엉망이 되곤 했다. 온종일 누워있는 그녀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아~~ 파”라는 말뿐..

그녀를 부축하는 조르쥬, 체중을 실려 부둥켜안은 노부부의 모습이 멀리서 보면 느린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스텝을 밟는 모습처럼...     

에바는 엄마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아빠를 힐책하고 아빠는 “그런 네가 데려가 모실 거냐?”라고 따진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책임을 묻는다.     

먹는 것을  거부하는 에바에게 억지로 물을 먹이는데... 안느는 삼키는 대신 물을 밖으로 뱉어버린다. 조르쥬는 자신도 모르게 안느의 뺨을 때리고.... “미안해”...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일까? 뺨을 때린 것이....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이...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자신이 얼마나 버틸지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내의 침실로 간다. 캠프에 참여했던  어린 날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머니께 캠프가 마음에 들면 꽃이나 별을 엽서에 그려 보냈는데... 수많은 별이 있었던 그 엽서 생각이 난다고...  베개로 아내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주고...

꽃을 사 오고....     

그녀가 잠든 방을 외부에서 테이프로 봉인한다

그녀가 살던 집. 살던 방이... 그녀의 무덤이 되었다.

늙어가는 이들에게 삶의 공간은 축소된다. 집. 거실...  그리고 방. 그리고 침대 위...

그곳이 무덤이 되거나 무덤으로 가기 직전의 마지막 영토... 자신이 자신을 다스릴 마지막 영토가 되는 것이다. 조르쥬와 안느 만이 아니라 유한한 생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테이블에 앉아 끝없이 무언가를 쓴다. 유서인지, 기록인지...

딸을 위해 쓰는 건지, 자신을 위해 쓰는 건지... 안느를 위해 쓰는 건지....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쓰는 건지... 모를 글을 쓰는 동안 열린 창문을 통해 비둘기가 들어와 글을 쓰는 서재까지 걸어온다.     

"믿기 힘들겠지만 집에 비둘기가 들어왔어. 벌써 두 번째야.

마당 쪽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왔지. 사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더군

이불로 비둘기를 덮쳤지.... 비둘기를 품에 안아보았어... 그리곤 그냥 놔주었어..."


조르주는 부엌에서 들리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깬다.

그릇을 씻는 안느. 너무도 멀쩡한 모습의 안느를 본다.

“당신 먼저 신발 신고 있어요.”

“그래”

“당신 외투 안 입어”

두 사람이 현관문을 열고 사라진다...     

조르쥬의 죽음을 암시하는  결말이지만 많은 생각을 남긴다.     


모든 일이 끝나고............ 딸은 부모의 집에 돌아와....

거실의 겨자색 의자에 앉는다. 조르쥬와 안느가 앉아 책을 보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음악을 듣던 그 의자에...  아버지의 낡은 의자에 앉는다. 아버지가 바라보던 시선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바라본다.     

이미 그들은 없고 그들의 몸을 물려받은 딸이 앉아있다. 영화의 엔딩 장면이다...

미하엘 하케네 감독은 부모의 낡은 의자에 앉은 딸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일까.

생로병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낡은 겨자색 의자는 여전히 남아도 그 위에 앉았던 사람들의 모습은 사라진다는 것을..  

        


원래 이 작품의 원제는 ‘아무르(사랑)’가 아니고 ‘음악이 멈춘다’였다고 한다.

훨씬 더 영화에 어울리는 제목이다. 늙음과 소멸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이야기하는 영화..

안느의 마지막을 질식사로 마무리한 조르주의 행동도 고통스러운 그러나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의 행위였다. 사랑이란 주제에 충실하자며 ‘아무르’가 더 어울리지만...

그들의 사랑은 고통 속에서도 이어지지만.... 그들의 삶이 멈추는 순간 음악이 멈추었다.     

그들의 집에 늘 흐르던 음악. 일상, 아름다움, 애정, 호의, 배려, 미소, 웃음, 연민이라는 것들이.... 어느 순간 찾아온 인생의 방문객(병)....으로 인해 멈춘다.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이 누구든 있을 것이다.

심각한 병이 아니었을 때 입원은 일종의 여행처럼 여겨졌다. 나는 책을 몽땅 트렁크에 싣고 갔다.

고작 일주일 입원에 그 책을 다 읽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1인실이 아닌 다인실 병실에서 책만 보는 여자는 기이한 환자처럼 보였으리라...

누군가가 틀어놓은 드라마, 예능 방송, 심지어 홈쇼핑 광고...

병실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병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그 야만의 텔레비전이었다.

정말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루종일 소음을 뿜어내고.... 병실의 밤이 찾아오면 비로소 꺼졌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누군가가 재빨리  버튼을 눌렀다. 그것은 병실의 기상벨이었다.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아픔보다 견딜 수 없었던 그 소음이었다.  병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소음을 견딜 수 없었고 같은 병실의 환자들은 적막함을 견딜 수 없었나 보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병실.. 그것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었으리라..      

    

그 후 수술을 해야만 했던 심각한 병으로 입원을 했던 적이 있다. 수술 전날 종교가 무엇인지를 묻고.... 병동 수녀님이 다녀갔다. “젊네요” 침대 발치의 나이를 보고 말씀하셨다. 성수를 놓고 가셨다.

분명 나는 젊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런 병에 걸려 수술을 받기에는...

더 나아가 수술 후 잘못되어 죽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하면 젊은 나이였다

죽기에는 젊은 나이....

수술 전에는 1인실이었고 수술 후에는 2인실이었다. 

이번에는 같은 병실의 환자에게 찾아오는 지인들의 소음(?) 이 힘들었다

물론 내게도 가족들이 찾아오고 방문객이 다녀갔다.

환자인 나는 지인들의 방문을 자제했고.... 병실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했다. 하지만 같은 병실의 환자와 그 가족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텔레비전 리모컨을 눌러대고 대화를 하고.... 어린 손주는 병실을 뛰어다녔다. 병실..... 난 몸이 아파서 병실이 견딜 수 없는 게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마지막을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다.

어머니와의 이별을 위해 어머니 고향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다. 시끄럽고 요란했다.... 하지만 이해가 되기도 했다. 마지막 이별의 인사에.... 이 정도의 요란함은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내가 입원했던 대학병원 2인실의 그 요란했던 환자의 가족들도 어쩌면  이별의식이었을까...     


호스피스 병동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환자들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그곳이 어머니의 마지막 영토였다. 좁은 침대 위가 어머니가 지상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허락된 영토였다. 차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어머니의 집을 지척에 두고도 병원에서는 만일의 사태를 염두에 두고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누구든.... 그런 날이 오리라...

영화 <아무르>의 안느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입원을 시키지는 말라는 당부가...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가 된다.

곁에 있는 자에게는 엄청난 희생과 고통이 필요하지만 인생의 마지막을 병실의 침대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니까....   늘 살던 곳. 익숙한 곳...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미하엘 하케네 감독은 음악에 대한 조예가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반전도. 흥미로운 줄거리도, 멋진 대사도 없는.... 노부부의 영화에...

음악은 엄청난 예술성을 부여하고... 실제 80대인 주연 배우의 연기는 너무도 실제 같아서 눈물이 났다.   

  

죽음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는 “지금까지 죽음에서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것은 죽음이 우리를 붙들어 매고 설득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수사학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 누구도 반박하기 힘들다. “고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확정되는 때는 그가 죽음에 이르러서다.

사람들의 반복되는 죽음은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 똑같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한다. 죽음, 현 존재의 끝은 다른 존재자의 끝과는 다르다. 비가 그치거나, 빵을 다 먹은 다음과 같은 그런 끝도 아니고 막다른 곳에 다다랐을 때의 끝도 아니다. 다시 말해 죽음은 사라짐, 완성, 마무리, 중단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 방식이다. 인간의 삶에서 끝은 처음부터 내재된 것이다.     

이에 대해 알랭 바디우는 죽음은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외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죽음은 처음부터 각인된 원칙으로 적용하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 시점에 도래한다는 것이다. 죽음은 어떤 개인의 실존 강도가 특정 세계에서 제로 값이 되었음을 뜻하는데 핵심은‘존재’와 ‘실존’을 구분해야 한다.

죽음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라는 것. 바디우적 죽음이란 끝이나 유한성이 아니고 사건이나 변화도 아니다. 모든 개인은 죽음으로써 그가 속한 세계에서 실존의 강도가 제로가 되었음을 의미하지만 다른 모든 세계에서 그가 죽었는지는 확실 하지 않다는 것이다.

                                                                             알랭바디우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 중에서          


사랑은 독특한 둘에 관한 진리. 차이 그 자체에 대한 진리다. 다시 말해 사랑은 동일자 안에 타자가 깃들어있음을 증언하는 진리다. “ 사랑의 작품이란 동일자 - 동일한 둘- 안에서 차이의 환원 불가능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타자는 부정(不定)적으로 나 자신 안에 있다.”     알랭 바디우         

  

타자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나 자신 안에 있는 것...

조르쥬에게 안느는 자신이다

둘 사이를 분리할 수 없는, 환원 불가능한..... 형태를 정할 수 없는 유기체로서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

안느의 죽음이.... 조르주의 죽음을  이끈 것은  조르쥬 안의 안느가. 조르쥬 안의 또 다른 조르쥬가 이미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름진 얼굴과 주름진 손으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육체의 감옥에 갇힌 아내..

주름진 얼굴과 주름진 손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그 또한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지각한다.

아름답기에 두려운.... 실제 같기에 더욱 두려운 영화다.

영화의 처음 부분에 등장하던 관객들.... 다양한 포즈로 음악을 감상하는 그 관객들....

존재자로서의 죽음을 맞든 실존자로서의 죽음을 맞든....

하이데거 식이든.... 알랭 바디우 식이든....

언젠가 이곳에 없는 날이 온다. 저마다 생의 음악이 멈추는 날이 온다./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있어도 있지 않은 부재...

부재하면서도 있는 것...


실존과 존재..

연극 무대에선 우리에게

무대의 커튼이 내려오고

우리는 무대 뒤로 사라질 것.


어떤 역할을 맡았었는지

어떤 환호를 받았었는지...

사라진 뒤에는 무의미하다..


오직 사라지기 전.... 무대 위에서의

시간 만이 의미가 있는 것...

오늘 비 내리고... 5월 첫 주 일요일

나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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