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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러나 이미 어디론가.

르네 마그리트 작품 < 붉은 모델 The red model > 1937

르네 마그리트 작품 < 붉은 모델 The red model > 1937    


옹이가 드러나는 나무벽을 배경으로

신발인지, 맨발인지, 신과 발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물체가 서있다.

<붉은 모델>이다

바닥과 나무벽의 색, 신발과 맨발이 붉은 기운을 품고 있어서일까. 

작품 명이 붉은 모델이다. 처음엔 신발과 발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여 주변에 있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겨진 종이가 발의 양 옆에 있다. 발의 정면에 있는 물체는 담배꽁초 같은 느낌을 준다.


발이 잘린 사내(?)는 이곳에 없다.

발목 아래의 발을 잘라버리고  혹은 발을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떠났다

네발로 걷다가 비로소 두 발로 직립하게 된 호모에렉투스... 굳은 발바닥이 생을 견뎌주는 동안 두 손의 자유를 만끽하였으리라.

발은 위험으로부터의 도망과 모험으로의 전진, 비겁한 후진과 일단 멈춤... 시시각각 뇌가 전하는 명령어에 따라 움직임과 정지, 후퇴와 전진을 반복한다.


맨 발.... 사냥을 나갔다가 다친 발에 보드라운 짐승 가죽을 둘렀다. 보드라운 짐승 가죽은 생각보다 꽤 안락했다. 상처 난 발이 다 나았음에도 짐승가죽을 벗고 싶지 않았다. 내친김에 흘러내리거나 풀어지지 않게 끈으로 동여매었다. 진창이 된 곳에서도 뾰족하고 날카로운 가지들이 있는 곳에서도 발은 안전했다.

하나둘 보드라운 가죽은 발에 두르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쯤에서 원숭이와 꽃신 이야기 생각이 난다. 어릴 적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꽃신을 신지 않던 원숭이는 오소리가 원숭이에게 꽃신을 신으니까 점잖고 훌륭해 보인다고 칭찬을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돌밭을 달리거나 작은 개울을 건너뛸 때, 차가운 눈 위를 걸을 때 발바닥이 아프지도 시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꽃신을 신기 시작했다.

원숭이에게 꽃신을 선물한 오소리는 처음에는 꽃신 값이 공짜였지만 두 번째부터는 잣 다섯 송이, 잣 열 송이. 잣 스무 송이. 잣 백송이. 잣 삼백송이에 집 청소와 개울 건널 때 업어주기 까지 점점 요구사항이 늘어난다.

처음의 오소리는 원숭이에게 아첨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원숭이가 꽃신에 길들여지면 질수록 오소리가 원숭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주인에서 노예로 바뀌어가는 데도 원숭이는 꽃신을 얻기 위한 욕망에만 집착한다. 오소리의 노예이기도 하지만 본질은 꽃신의 노예가 되어버린 셈이다.     


물론 사람은 누군가에게 복종하기 위해 신발을 처음 신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신발이 발을 보호하는 본래의 기능을 벗어나 편리함과 예술성을 갖춘 하나의 명품, 빈부의 차이를 보여주는 상품으로 보이면서 사람도 신발에 길들여지게 되었다. 어떤 신발을 신느냐는 그 사람의 직업을 보여주기도 하고 어떤 브랜드의 신발을 신느냐는 그 사람의 경제적 수준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디언 속담에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면 그가 신는 신발을 신고 걸어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의 ‘신발’은 실제 신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옷일 수도 있고 모자일 수도 있고, 장갑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의 현재 상황 전체를 신발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르네 마그리트의 붉은 모델은....

고급 신발이라기보다는 끈이 달린 가죽 반장화처럼 보인다.

적어도 날렵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구두는 아니다.

신발. 자신을 옭아매는 신발을 벗어던지고.. 떠난 사람     

맨 발이 신발로 변해가는 과정인지 신발이 맨발로 변해가는 과정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그 어떤 경우든 신발에 길들여진 상황에서... 신발을 벗어던지고 싶으나 쉽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발의 얼굴처럼 보이는 꿈틀거리는 발가락들..

발등까지는 아직 침범하지 않은 거무튀튀한 신발의 흔적들...

아직은 꿈틀거리는 발가락이 있지만 더 시간이 지나면 발가락 끝까지 잠식해 버릴 그 신발의 힘이 두려웠던 것일까.


신발을 벗어두고...  신발 안에 발도 남겨두고 떠났다,

그 붉은 모델은 붉은 흙을 딛고 붉은 나무 벽을 뒤로하고........

다소곳하게 가지런하게 신발로 서있다....

떠나기 전 담배 한 대를 나무 담에 기대어 피웠을 것이고...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 아마도 어쩌면 경매에 넘긴다는 소식, 법원에 출두하라는 안내문.

아니면 해고 통지.. 아니면 대부업자의 청구서.... 아니면...... 또 아니면.... 

상상할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불편한 소식들이 그 구겨진 종이쪽지에 적혀있지 않았을까.     

절반은 사람의 발이고 절반은 반장화처럼 보이는 르네마그리트의 작품

<붉은 모델>은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러나 이미 어디론가 가버린 것만 같은..

족쇄가 어디에도 채워져있지 않지만 자꾸만 족쇄가 채워진 것처럼 보이는....

두려우면서도 기묘하면서... 슬프기도 한.....

자꾸만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그의 작품 앞에 눈이 멈춘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문학나눔 우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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