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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인가요?

브와디스와프 슈필만(Władysław Szpilman) / 로만 폴란스키

피아니스트 / 로만 폴란스키 감독 / 

 2002년 제75회 아카데미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 수상

. 200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인가요?"

"전 피아니스트입… 피아니스트였습니다."

"피아니스트? 이리 와보시오." 

(피아노를 가리키며) "연주해 보시오."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Władysław Szpilman)의 저서를 바탕으로 한 2차 세계 대전, 홀로코스트 영화 <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이다.

독일군 장교 호젠필트에게 은신처가 발각된 상황에서 슈필만은 어쩌면 지상에서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연주를 한다.


호젠필트의 질문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인가요?"


나는 이 질문 앞에 멈추었다. 영화의 어떤 가슴 절절한 장면보다도 나를 순간적으로 정지시킨 질문이다.

누군가 내게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흰건반과 검은건반 사이를 손가락이 달리며 음악을 세상에 내놓듯.... 

내 손가락은 자판 위를 달린다. 그렇다고 내가 세상에 내놓는 것들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나를 찾기 위해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를 견딜 수 없어서, 무기력해지고 싶지 않아서,  끝없이 실존을 묻고 싶어서..

지금 여기, 컴퓨터 앞에 앉아, 손가락으로 덧없는 것들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나는...

습하지 않은 눈, 병원에서 처방받은 인공 눈물을 흘려가며... 무언가를 쓰고 있는 나는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인가요?" 란 말에 쉽사리 답을 하지 못한다. 답을 할 수 없다. 나의 존재 이유가 모호하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풀리지 않는 화두.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 사이

명쾌하게 답을 하지 못하는 나는..... 정말 누구이며 정말 뭐 하는 사람일까

생과 사, 전쟁의 한 복판에서도 내가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면

나는 분명 그 무언가를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나는 '무언가'를 하는 ' 누구 '이다라는.... 


 홀로코스트영화를 통해 전쟁의 야만적인 얼굴을 본다. 지금도 지구상 어딘가에서 진행 중인 전쟁

돌칼 돌도끼에서 청동검으로 철제 무기로.... 핵무기로...  무기의 잔혹한 진화.

어쩌면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참혹함 속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인간다움이 있다. 전쟁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전쟁 영화들. 선과 악의 공존. 악은 때로 선의 얼굴로. 선은 때로 악의 얼굴로 나타난다. 악의 얼굴로 자행되는 선과 선의 얼굴로 자행되는 악. 어떤 선과 어떤 악의 위계를 정할 수 있을까.

전쟁에서 선과 악은 분리불가의 샴쌍둥이처럼 존재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폐허 속에  슈필만은 '피아니스트'라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살아남는다.

피아니스트... 전쟁 전에도 그는 피아니스트였고 목숨을 구걸하며 쫓기는 상황에서도 그는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니스트로 살았고 피아니스트였기에 살았다. 그리고 피아니스트로 살다가 죽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로 살아왔으며 누구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 채로 남겨질 것인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이런 질문을 안겨주었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블라덱 슈필만이 폴란드 공영방송에서 쇼팽의 야상곡 C# 마이너를 연주하다 방송국이 포격을 당하여 미처 연주를 끝내지 못하고 바깥으로 도주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슈필만과 가족들은 바르샤바에 고립된다. 슈필만의 가족들은 독일 침공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 방송을 들으며 환호하지만 폴란드는 결국 독일군의 지배를 받는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시작되고 다윗의 별 휘장을 소매 끝에 단 유대인들의 출입금지 구역이 늘어간다. 독일군 사령부는 바르샤바에 대규모 게토를 조성해 3년 동안 격리하기로 결정하고 게토에서 돈을 버는 것은 물론 먹는 것조차 힘들어져 수많은 유대인들이 길바닥에서 죽어나간다. 슈필만은 게토 내 식당에서 피아니스트로 근무한다. 게토 안에서도 사람들의 계몽활동과 저항운동을 위해 일하던 돌렉은 가족들과 신문을 만들어서 화장실에 뿌리고 있었고, 마요렉은 돌렉과 같은 이들을 돕기도 하며 이곳저곳의 힘 있는 지인을 곤란한 유대인들에게 연결시켜 주는 일을 했다. 유대인들은 나치 독일 기업인들의 허락 없이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법안이 공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독일군의 인종 청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가족들은 수용소로 끌려가 최후를 맞게 되는데 슈필만은 우연히 유대인 경찰 이츠하크의 도움으로 수용소 행에서 구출되고 그때부터 은신처를 옮겨 다니며 생명을 연명한다. 슈필만의 은신을 도와준 이들은 대부분 붙잡혀 목숨을 잃지만 슈필만은 독일이 패망하여 물러가는 날까지 살아남는다. 

슈필만에게도 최대의 위기가 있었는데 게토의 폐건물 다락방에 숨어 지내다 독일군 장교인 호젠펠트에게 발각된다. 호젠펠트는 슈필만이 피아니스트라고 하자 피아노 연주를 시켰고, 슈필만은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연주이기에 쇼팽의 발라드 1번 G 마이너를 연주한다. 폐허가 된 게토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가 이 영화의 핵심이다.  

호젠펠트는 유대인인 슈필만을 즉결처형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  소련군의 공격이 점점 거세지며 독일군은 퇴각하게 되는데, 호젠펠트는 슈필만을 마지막으로 만나고는 식량을 넘겨주며 퇴각 사실을 전한다.     

호젠펠트: 전쟁이 끝나면 뭘 할 건가?

슈필만: 다시 연주를 해야겠죠. 국영방송에서.

호젠펠트: 이름이 뭔가? 꼭 들어보겠네.

슈필만:... 슈필만입니다.

호젠펠트: 슈필만이라... 피아니스트다운 이름이로군.     

전쟁이 끝난 후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서 피아니스트로 다시 활동하게 된 슈필만은 동료 음악가로부터 호젠펠트가 수용소에 갇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용소를 찾아가지만 이미 그 간이수용소는 철거되고 호젠펠트는 다른 곳으로 보내진 뒤였다. 영화의 마지막 장명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슈필만의 모습으로 끝난다.        

         


*브와디스와프 슈필만(Władysław Szpilman)     

 원래는 폴란드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피아노를 치는 피아니스트였고 게토에서도 피아니스트로 일했으나 유대인들이 수용소로 끌려간 뒤에는 노동자로 일했다. 3년이 넘게 도피생활을 했고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 헨릭(Henryk). 블라덱의 동생으로 나치뿐 아니라 나치에 협조하는 유대인 경찰도 역시 싫어한다. 유대인들이 무장봉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직설적인 성격이다.  대규모 강제이주를 당한 후 정황상 트레블링카(Treblinka로 끌려간 것으로 보이나 생존 여부는 나오지 않는다. 게토에서 강제이주 당하기 전에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인 샤일록이 한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찌르면 피가 나지 않는가? 간질이면 웃지 않는가? 독을 먹이면 죽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에게 복수하지 않겠는가?"     


 *도로타 

블라덱의 연주를 보러 블라덱의 친구인 오빠 유렉을 졸라 방송국에 왔던 첼리스트. 슈필만은 그녀에게 호감을 갖지만 게토가 조성되고 슈필만이 게토로 끌려가면서  이별한다. 슈필만과 우연히 재회하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한 후였고 도로타의 남편은 슈필만의 도주를 도와준다.


*빌헬름 호젠펠트

빌헬름 호젠펠트 대위(Captain Wilhelm Hosenfeld) 독일 육군 보병 대위로 후에 블라덱을 숨겨주고 먹을 걸 챙겨주는 인물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독일인들 중 유일하게 슈필만을 'du(너)'가 아니라 'Sie(당신)'로 칭한다. 이후 소련에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다가 1952년에 스탈린그라드에서 사망한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직후, 폐건물에 숨어 있던 슈필만이 통조림을 따다 바닥에 떨어뜨려 굴리는 바람에 호젠펠트 대위에게 발각된다. 호젠펠트 대위는 "누구시죠?"라고 묻고, 얼어붙은 슈필만이 아무 대답도 못 하자 재차 묻는다. 피아니스트란 대답을 듣고는 옆에 있는 피아노를 가리키며 "연주해 보시죠."라고 말한다. 슈필만은 마지막 연주를 하는 심정으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호젠펠트 대위는 슈필만을 끌고 가는 대신 그의 거처를 살펴보고 잼과 빵 등을 수시로 가져다준다. 소련군의 진격으로 퇴각하기 전, 며칠 분의 식량을 전해주고 입고 있던 장교용 겨울 코트를 벗어준다.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할 것인지 묻고, 국영방송에서 다시 연주를 할 것이라고 하자 꼭 들어보고 싶다고 말한다.  "피아니스트다운 이름이군요"라고 말한 뒤 떠나지만 그 후 소련군에 포로로 붙잡혀 수용소에서 사망한다.      


실존인물 호젠펠트 대위

 1895-1952. 헤센 출신으로 원래는 교사였는데 전쟁이 나면서 독일 제국군 육군에 징집됐다.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고 당시 불던 독일의 애국주의에도 영향을 받아 고민을 하다가 결혼을 하면서 아내 안네 마리에게 평화주의적 영향을 받게 됐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1917년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 교사를 하다가 1939년 예비역 소집되어 폴란드 주둔군 병참부서에 배치되었는데 후에 공개된 그의 일기를 보면 그는 독일군이 폴란드에서 저지르고 있는 잔혹범죄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진심으로 슬퍼하는 내용이 있다. 호젠펠트는 독일군 내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여 학살범죄에 노출된 피해자들을 구조하였는데 호젠펠트가 구조한 사람은 슈필만 한 사람이 아니며 다수의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다.  1945년에 소련군에게 붙잡혀 25년형을 선고받아 고문을 당했고 고문후유증으로 추정되는 흉부대동맥 파열로 1952년에 사망했다. 폴란드인들이 그가 한 행동을 알려 탄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슈필만은 그를 구하지 못한 것을 평생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홀로코스트와 인종차별 문제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유대인은 희생양으로, 폴란드인은 나라를 잃은 애국자들로, 나치 독일은 잔인한 전범으로 그려지는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영화와는 다르게,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시대적 상황하에서 여러 가지 인간상을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삶이란 무엇일까? 그토록 모진 상황하애서도 누군가는 끝내 살아남아 역사를 증언해야 한다. 

야만과 광기의 역사. 지속되고 되풀이되는........ 

웃고 있는 정복자 독일군인의 얼굴과 참혹한 표정의 슈필만의 얼굴에서 인생의 극과 극을 본다.

7월이 시작되었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규명해야 하는 그런 시간이다/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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