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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참을수 없는 가벼움,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하여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이 책을 펼치면 제일 먼저 마주하는 내용은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것이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20세기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밀란 쿤데라의 작품.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유독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하여 생각한다.

아마도 쿤데라는 이 책을 집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중에서 제목을 고민하지 않았을까 싶다.

'참을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존재'를 수식하는가와 '가벼움'을 수식하는가에 따라 굉장히 다른 느낌을 준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저마다 실존의 무게를 지닌다. 깃털처럼 가벼운 것부터 납덩이처럼 무거운 것에 이르기까지.. 존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울 리가 없다. 깃털만큼의 생의 무게에도 질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납덩이에 짓눌리는 생에도 견디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 칭한 것은 모순적 의미 속에 진리를 드러내고 싶은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에 의미가 집중된다.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존재가 존재한다. 자신이기도 하고 타인이기도 한... 그러나 그 참을 수 없는 존재는 깃털처럼 가볍기도 하고 납처럼 무겁기도 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 그 존재가 삶을 송두리째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린다면 인생에 가벼운 경박함이 일어난다. 때로 그 가벼운 경박함은 치명적인 운명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 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참을 수 없는’ 생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오가는 우리들의 자화상     

     

토마시와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테레자는 고향을 떠나 그의 집에 머문다. 테레자는 토마시를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지한 사랑을 부담스러워하던 토마시는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을 만난다. 스스로가 ‘에로틱한 우정’이라고 이름 붙인 그 ‘가벼움’을 토마시는 버릴 수가 없다. 소련의 침공으로 체코가 자유를 잃은 후, 두 사람은 함께 스위스로 넘어간다. 체코를 벗어나면 토마시의 연인들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테레자는, 그 믿음을 잃은 후 홀로 국경을 넘어 프라하로 돌아간다. 질투와 미움이 뒤섞인 두 사람의 삶은 그렇게 점차 무게를 더해 간다.     

     

한편 토마시의 연인 사비나는 끈질기게 자신을 따라다니는 조국과 역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다. 밥을 먹어도, 그림을 그려도, 거리를 걸어도 자신에겐 ‘조국을 잃은 여자’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을 그녀는 견딜 수 없다. 사비나는 체코에서 멀리,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떠난다. 학자이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안정된 일상을 누리던 프란츠는 그런 사비나의 ‘가벼움’에 매료되고, 그는 보이지 않는 사비나의 흔적을 좇듯 역사의 흐름에 몸을 던진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역사의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 네 남녀의 사랑은, 오늘날 ‘참을 수 없는’ 생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며 방황하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역사의 상처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존재의 가벼움을 느껴 보지 못한 현대인, 그들의 삶과 사랑에 바치는 소설.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어느 쪽이 옳은가. 니체의 영원한 재귀는 무거움이지만 실제요, 진실이다. 반면 우리의 삶은 단 한 번이기에 비교도 반복도 되지 않아 깃털처럼 가볍다. 질투 없이는 사랑할 수 없는 약한 테레자, 사비나의 외로운 삶. 토마시에게 테레자는 무거움이요 사비나는 가벼움이다.     

일인칭이면서 전지적이요 직선이 아닌 반복서술, 그리고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이분법의 와해, 그런 메타포에서 탄생한 인물들. 쿤데라는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매끄러움과 개연성을 거부하는 실험적인 기법들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아픔과 삶의 한계를 표현하고 있다.  / 출판사 책 소개 


Francis Picabia(프랑시스 피카비아 1879–1953)     

반은 프랑스인, 반은 스페인인 혈통인 Francis Picabia, 1879년 파리 태생  인상주의, 입체파, 추상화, 야수파.  예술사에서  그를 카멜레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민음사판 처음 표지 그림은 프랑시스 피카비아의 <열대>라는 작품이다.

 한눈에 보아도 괴이한 느낌을 준다. 남과 여, 서로 부둥켜안고 의미심장한 키스를 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두 사람 사이에 빨간 지붕 하얀 벽의 건물이 있다. 그리고 두 개의 눈 외에도 여러 개의 눈을 가진 두 사람은 끝없이 시선이 다른 데로 향한다.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다른 곳에 한 눈을 파는 두 사람.. 특히나 여자는 입 속에 또 하나의 작은 입을 지니고 있다. 커다란 입 속의 또 작은 입.... 

그들에게 사랑이란 우연도 필연도 아닌 동상이몽처럼 보인다. 가벼움과 무거움과, 다가감과 멀어짐을 반복하는 두 사람은 토마시와 사비나인지 토마시와 테레자인지 사비나와 프란츠인지...

아니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남과 여를 상징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목차

1부 가벼움과 무거움

2부 영혼과 육체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

4부 영혼과 육체

5부 가벼움과 무거움

6부 대장정

7부 카레닌의 미소        


목차를 구성하는 밀란 쿤데라의 의도에 또 한 번 놀란다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을 사이에 두고 가벼움과 무거움, 영혼과 육체가 지층처럼 반복된다

그러나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읽히는 것은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을 읽은 후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장정... 대장정은 프란츠, 사비나, 토마시, 테레자 네 사람의 운명이  걷고 있는 방향을 그리고 있으며

이 책의 마무리는 평생을 테레자에게 꼭 붙어 살던 암컷 개  '카레닌'의 죽음으로  끝난다.


      


소설의 배경은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 사건 무렵이다. 소련 침공 초기 시절, 사람들은 모든 도시의 거리 표지판을 떼었고, 도로 안내 표지판도 뽑아버렸다. 하룻밤 사이에 온 나라가 익명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 이 익명성이 나라에 아무런 위험도 주지 않은 채 그냥 스쳐 지나간 것 같지는 않았다. 거리나 집, 어느 하나 원래 이름을 되찾지 못하였다. 도시가 하루아침에 상상 속 작은 소련으로 뱐해버렸고 추억을 압수당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것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빛-어둠, 두꺼운 것-얇은 것, 뜨거운 것-찬 것, 존재-비존재와 같은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는 이 모순의 한쪽 극단은 긍정적이고 다른 쪽 극단은 부정적이라 생각했다. 이 이론은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선명한 것, 뜨거운 것, 가는 것, 존재하는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누는 극단적 이분법이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단 이 경우는 예외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책에 등장하는 4명의 남녀, 토마시, 사비나, 테레자, 프란츠를 따로 묶어서 보면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쉽다

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 토마시


사랑의 역사는 그 후에나 시작되었다. 그녀의 몸에서 열이 나는 바람에, 그는 다른 여자들에게 그랬듯이 그녀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자 불현듯 그녀가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내려 와 그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은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테레자에게 얽매여 칠 년을 살았고, 그녀는 그의 발길 하나하나를 감시했다. 마치 그의 발목에 방울을 채워 놓은 것 같았다. 이제 그의 발걸음은 갑자기 훨씬 가벼워졌다. 거의 날아갈 듯했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마술적 공간 속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했다.     


토마시는 생각했다.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상충되는 두 가지 열정이라고,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그는 출구가 없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애인들 눈에 그는 테레자에 대한 사랑의 도장이 찍힌 사람으로 보였고, 반면 테레자의 눈에는 여러 애인들과 나눈 사랑 편력의 도장이 찍힌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신이 살인은 예측했을 테지만 아마도 외과 수술은 예측하지 못했을 거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신은 자신이 발명해서 조심스레 피부로 감싸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은폐하고 봉합한 체제 내부에 인간이 감히 손을 집어넣으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토마시는 처음으로 마취 상태에서 축 늘어진 환자의 피부에 메스를 대고 확고한 힘을 가해 그 피부를 찢고 다시 정확한 솜씨로 봉합하면서 (마치 외투 자락이나 치마, 커튼 자락처럼 영혼 없는 헝겊 조각을 대하듯) 아주 순간적이지만 강렬하게 신성모독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의학에 이끌린 것은 필경 이런 점 때문이었다! 이 필연, 그의 가슴속 깊이 뿌리내린 이 ‘es muss sein!‘이었으며 그를 이 필연으로 내몬 것은 우연도, 외과 과장의 관절염도 아니며 외부에서 유래한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의학에 대한 그의 애정에서 비롯된 ˝es muss sein!˝은 내면적 필연성이었던 반면, 그때 그것은 사회적 관습이 개입한 외부적 ˝es muss sein!˝과 관련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결 어려웠다. 내면의 명령은 더욱 강렬하고 그래서 더욱 강하게반항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외과의사는 사물의 표면을 열고 그 안에 숨은 것을 들여다본다. 토마시에게 ˝es muss sein!˝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가고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도 이런 욕망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때까지 자신의 소명이라 믿었던 모든 것을 털어 버렸을 때 삶에서 무엇이 남는지 보고 싶은 욕망.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여자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지닌 상상 못 하는 부분, 달리 말해서 한 여자를 다른 여자와 구분 짓는 이 100만 분의 1의 상이성에 사로잡힌 것이단     

그와 테레자의 사랑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피곤하기도 했다. 항상 뭔가 숨기고, 감추고, 위장하고 보완하고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하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질투심과 고통과 꿈에서 비롯된 비난을 감수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이제 피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          


인류가 매번 더욱 성숙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다른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원회귀에 대한 토마시의 생각이다.

지구(1번 행성, 미체험 행성)에 사는 우리는 당연히 다른 행성에서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막연한 개념밖에 지닐 수 없다. 인간이 더 현명해질까? 인간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반복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낙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 역사가 피를 덜 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

             

토마시의 묘비명 : 그는 지상에서 하느님 왕국을 원했다     


* 사비나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배신, 우리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교사들은, 배신이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것이라고 누차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배신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은밀한 삶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여자로 사는 것, 이것은 사비나가 선택하지 않은 조건이다. 선택의 결과가 아닌 것은 장점이나 실패로 간주될 수 없다. 우리에게 강요된 상태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적합한 태도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 사비나의 생각이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것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그녀에게는 부조리하게 보였다. 


* 테레자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     

다시 한번 우연의 새가 그녀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곁에서 자고 있는 토마시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무한한 행복감을 느꼈다.      

    

『안나 카레니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프라하 거리를 쏘다녔다.

저녁에 그녀가 초인종을 눌렀고 그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책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토마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인양, 자기가 가진 통행증이라곤 이 비참한 입장권밖에 없음을 깨달은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    

모든 육체가 평등했던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살러온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데 토마시는 그녀와 다른 여자들 사이에 평등의 선을 그었다. 같은 방식으로 모든 여자에게 키스했고, 같은 방식으로 애무했으며 테레자의 육체와 어떤 구별도, 추호의 구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토마시는 테레자가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세계로 되돌려 보낸 셈이다.          

테레자는 토마시가 하는 말을 낮에는 곧이곧대로 믿고(실제 그렇게 하진 못했다.) 그때까지 그래 왔듯 명랑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낮 동안 고분고분하게 길들었던 질투심이 꿈속에서는 격렬하게 기승을 부렸다. 그녀의 꿈은 항상 토마시가 곁에서 흔들어 깨워 줘야만 멈추는 신음 소리로 마무리되었다.     


꿈들은 웅변적일 뿐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다. 프로이트가 그의 꿈에 대한 이론에서 놓쳤던 것이 바로 이런 측면이다. 꿈은 커뮤니케이션(암호화되긴 했지만) 일뿐 아니라 미학적 활동, 상상력의 유희이며, 이 유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다. 꿈은 상상하는 것, 없는 것을 희구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심층적인 욕구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다. 바로 그 점이 꿈속에 철면피한 위험이 은폐된 이유이기도 하다. 꿈이 아름답지 않다면 쉽게 잊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테레지는 쉴 새 없이 자신의 꿈으로 되돌아가며 꿈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하고 전설로 만들었다. 토마시는 테레자의 꿈이 지닌 처절한 아름다움의 최면적 매력 속에서 살았다.       


현기증이란 무엇인가? 추락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튼튼한 난간을 갖춘 전망대에서 우리는 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까?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짓을 저지르고 싶었다. 지나간 칠 년을 단번에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것은 현기증이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극복할 수 없는 추락 욕구. 현기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이 탄생하는 순간은 이런 것과 유사하리라는 것을 테레자는 알았다. 여자는 분노에 찬 영혼을 부르는 목소리에 저항하지 않는다. 남자는 자기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영혼의 여자에게 저항하지 않는다. 토마시는 결코 사랑의 함정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고, 테레자는 매시간, 매분마다 그를 위해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가질 수 있는 무기란 무엇일까? 오직 자신의 정조뿐.

처음부터, 첫날부터 마치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 버린 듯 그녀가 그에게 바쳤던 정조, 그들의 사랑은 비대칭적인 이상한 건물이었다. 그들 사랑은 단 하나의 기둥으로 세워진 거대한 궁전인 양 정조에 대한 테레자의 절대적 확실성 위에 세워진 것이다.  


토마시가 그런 사진을 받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녀를 내쫓을까? 그렇지는 않겠지. 그건 아니야. 그러나 그들 사랑의 위대한 건물은 보기 좋게 파괴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건물은 그녀의 정조라는 단 하나의 기둥으로 지탱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제국과도 같아서 제국을 떠받치는 이념이 사라지면 이념과 함께 제국도 멸망하는 것이다.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발적 사랑이다.(테레자는 다시 한번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며 깊은 회한을 느꼈다. 어머니가 모르는 마을 여자 중 하나였다면 아마도 그녀의 쾌활한 천박성이 테레자에게 호감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아! 어머니가 남이었다면! 어머니가 자기 얼굴 윤곽을 그대로 지녔으며 그녀로부터 자아를 탈취해 간 것에 대해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항상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너의 아버지와 너의 어머니를 사랑하라!‘라는 천 년간의 명령이 그녀로 하여금 자기와 어머니의 닮은 점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폭력을 사랑이라고 명명하도록 강요한다는 점이었다. 테레자가 어머니와 결별한 것은 어머니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어머니와 인연을 끊지 못한 것은 어머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기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목욕물을 받았다. 그녀는 뜨거운 물속에 누워 자신이 일생 동안 자신의 허약함을 빌미로 토마시를 이용해 먹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는 힘 있는 자들 중에서 범인을 찾고 약한 사람들 속에서 무고한 희생자를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금 테레자는 자신들의 경우는 정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꿈조차 이 강한 남자의 약점을 찾아내 그를 뒷걸음질 치게 만들려고 테레자의 고통을 과시한 것이다. 테레자의 약함은 그가 더 이상 강하지 않아 그녀 품에서 토끼로 변할 때까지 매번 그에게 타협을 강요했던 공격적인 약함이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그 꿈에 대해 생각했다.       

테레자는 토마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갯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 프란츠     


˝프란츠의 아버지가 느닷없이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 어느 날 문득 어머니 혼자 남게 되었던 것은 그의 나이가 열두 살쯤 되었을 때였다. 프란츠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고 의심했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평범하고 차분한 말투로 비극을 감추었다. 시내를 한 바퀴 돌자고 아파트를 나오는 순간, 프란츠는 어머니가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고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비나 앞에서 이토록 자신감이 결핍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에겐 자신을 의심할만한 어떤 이유도 없었다. 그들이 만난 직후 처음 호감을 드러낸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 미남이며 학계에서 출세가도의 정상에 서 있었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그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매일 되풀이해야만 할까?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공적인 삶의 연장이 아니라 그 대척점이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였다. 마치 포로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모든 무기를 내던져야 하는 군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방기 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아무런 방어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언제 공격당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했을 때 그 젊은 여학생은 그의 첫 번째 독자였고, 그녀는 그와 토론을 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그는 사비나가 이 논문에 대해 무슨 말을 할지만 생각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사비나를 위해, 그녀를 기쁘게 해주는 식이었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 탄생될 수 있다.      

 

프란츠의 비석에는 '오랜 방황 끝의 귀환'이라고 적혀있다.. 지상의 삶에서의 방황, 신의 품으로의 귀환          


* 이 책에 등장하는  사비나의 중산모자의 의미에 대해 


거울 발치께 낡은 중산모자를 얹은 마네킹 두상이 있었다, 사비나는 몸을 숙여 모자를 들고 머리에 썼다. 금세 거울 속 모습이 달라 보였다.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무심한 표정의 아름다운 여자가 머리에 전혀 맞지 않는 중산모자를 쓰고 속옷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회색 양복에 넥타이를 맨 한 신사의 손을 잡고 있었다... 프란츠는 이상한 게임, 두 사람만을 위한 은밀한 해프닝을 연출하려는 사비나를 이해하고 미소를 지었다.. 중산모자를 조심스럽게 사비나의 머리에서 벗겨 받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사비나가 속옷차림으로 중산모자를 썼을 때 프란츠는 누군가가 미지의 언어로 말을 거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사비나는 프란츠가 가고 홀로 남아 거울 앞에서 속옷차림으로 중산모자를 쓰고 오랫동안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잃어버린 한 순간 동일한 한 장면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에 놀랐다. 중산모자와 관련된 토마시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수년 전 토마시가 사비나의 집에 왔을 때 토마시는 사비나가 옷을 벗는 동안 그녀의 머리에 중산모자를 씌웠다. 거울에 비친 그들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속옷 차림에 중산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 그림이 두 사람 모두에게 선정적으로 보였다.      


프란츠와의 사이에서 사비나가 쓴 중산모자는 농담의 의미, 희극적인 장치라면 토마시와의 사이에서 중산모자는 자극적인 도구였다. 속옷은 그녀의 여성다운 매력을 강조했고 펠트천으로 만든 딱딱한 남자모자는 그것을 부정하고 모욕하고 희화했다     


사비나의 중산모자는

첫째 한 세기 전 보헤미아 작은 마을의 시장이었던 조상의 흔적

둘째 사비나 아버지의 기념품.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일한 유산

셋째 토마시와의 에로틱한 게임에 사용되는 액세서리

넷째 그녀가 의도적으로 개발한 독창성의 상징 

다섯째,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물건, 지나간 시간의 유적     

사비나의 삼이 음악이었다면 중산모자는 그 악보의 모티브였다     


 동일한 사물(중산모자)을 머리에 쓰는 행위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잘 차려입은 신시에게 어울리는 모지를 속옷차림의 사비나가 머리에 쓴다.

똑같은 인물, 똑같은 상황, 똑같은 모자인데도 함께 있는 대상이 프란츠인지, 토마시인지에 따라 모자가 갖는 의미가 달라진다. 틀에 박힌 여성성을 부인하려는 사비나에게 프란츠는 "당신은 여자예요."라고 환기시켜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키치의 의미를 한 번에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키치 ( kitch)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짜인 것,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의미한 것,

예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본에 의한 것, 

과장된 것, 군중심리를 자극하는 것, 저항정신을 지닌 것

무거운 것을 가볍게 비틀어 재미를 주는 것

때로는 복고적이고 때로는 욕망적이고 때로는 향수를 자극하고 때로는 전복적인 것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키치와 비-키치의 사이에서 혼란스럽다. 


테레자와 토마시의 사랑을 언급하는 부분에 '우연'이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인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능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무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 한다.        


토마시에게 주어진 우연의 순간과 테레자에게 주어진 우연의 순간이 만난 것.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다. 시골을 떠나려는 테레자의 눈에 시골 마을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세련된 남자 토마시의 등장... 사실 이것을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테레자가 토마시에게 접근한 것은 다소 의도된 계산이고 세상 모든 여인을 자신의 잠재적 애인으로 생각하는 토마시에게는 유희의 순간이었을 뿐인데... 어쨌든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테레자의 무거움에 끌려 토마시는 잘 나가는 외과의사에서 유리창 청소부로 트럭운전사로... 변해간다. 아래로 내려가려는 현기증에 시달리는 테레자. 아래로의 회귀에 버팀목이던 토마시도 동반하여 아래로 내려간다. 편안한 사랑의 종말일까? 잠든 순간에도 토마시의 손을 붙잡고 잠드는 여자...

우연히 바구니에 넣어져 떠밀려온 아기 같은 여자... 난 아무리 상황이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 해도  토마시의 운명을 잡아끌고 내려가는 테레자의 집요하고 끈적거리는 운명이 싫고 무서웠다


 테레자의 어머니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모성애는 거룩한 것, 아름다운 것이란 생각을  단 번에 깨트리는 밀란 쿤데라의 의미 심장한 한 방이다. 


어머니는 테레자에게 어머니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라며 지칠 줄 모르고 설명했다. 아이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한 여인의 체험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녀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테레자는 삶의 최고가치는 모성애이고 모성애란 큰 희생이라고 믿었다. 모성애가 희생 그 자체라면 태어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 셈이다ᆞ          


모성애가 희생이라면 태어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

한참을 이 문장 앞에 멈추었다... 정말 세상의 모든 엄마들, 딸들의 가슴을 때리는 한 마디...

맞는 말이었다. 솔직히...

잉태라는 단어에는 얼마나 많은 희생이 들어있는 것인지... 그것을 모성애로 거룩하게 표현하지만 어미로서 자질이 부족한 상태로 우리는 갑자기 누군가의 어미가 된다. 준비도 없고, 연습도 없이...

그리고 갑자기 가장 크고 두려운 단어 '모성애'를 온몸에 두르게 된다. 나라는 자아와 누군가의 어미라는 자아는 늘 충돌한다. 버거운 싸움이다. 


밀란 쿤데라는 결국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 무슨 이야길 하려던 것이었을까, 가벼움. 그러나 가볍지 않은 가벼움. 무거움 그러나 무겁지 않은 무거움 같은 난해함


한 권의 책을 읽고도 저마다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어떤 이는 테레자와 프란츠를 무거움의 범주에  토마시와 사비나를 가벼움의 범주로 나누곤하지만 꼭 그렇개 나눌 수는 없다. 

테레자의 무거움은 어떤 이념. 확신. 자기세계의 무거움이 아닌  몽환적 꿈에 의지해서 상대를 납덩이처럼 끌고가는 집요하고 맹목적 무거움이라면, 프란츠의 무거움은 속물적인 아내와 딸에 지쳐  사비나를 쫓는. 이성적이고 이상적인(간혹 비이성적이기도 하지만) 무거움이다. 무거움의 무늬와 질감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사비나와 토마시의 가벼움도 결이 다르다. 가벼움이라고 다 같은 가벼움은 아닌 갓이다. 

이분법적으로 무거움과 가벼움을 나눌 수 없는 이유가 

토마시에게 사비나는 가벼움이고 테레자는 무거움이고

사비나에게 토마시는 가벼움이고 프란츠는 무거움이고

프란츠에게 사비나는 무거움이고 아내와 딸은 가벼움이고

테레자에게 토마시는 가벼우면서 무겁거나 무거우면서 가벼운것이고

테레자에게 카레닌은 무거움이고 엄마는 가벼움인 것처럼  

상대가 누구인가에 따라 동일 인물일지라도 인물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누군가의 딸로 무겁거나 가벼울수 있고 누군가의 엄마로 혹은. 아내로

무겁거나 가벼울 수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겁거나 가벼울 수 있다. 어떤 역할을 가볍고 어떤 역할은 무겁다. 어떤 히루는 무겁고 어떤 하루는 가벼운 것처럼.... 

깃털과 납덩이 사이를 넘나드는 것이 삶인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그러나 때로 참을 수 있는 .... 참을 수 있는 그러나 때로 참을 수 없는... 경계와 경계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


역사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         


저마다의 삶이... 사랑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것이기를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기를, 참을 수 있을 정도로 혹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기를 바란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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