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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칠 월> 허연.

칠 월/ 허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 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새벽에 폭우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빗나갔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이슬비가 내렸고 낮게 드리운 구름, 하늘은 낮았다.

맞아도 기분 좋을 비가 드문드문 내렸었다. 

대출 반납일이라 책을 반납하고... 다 읽지도 못할 책을 다시 빌려 돌아오는 길, 이 또한 욕심이다.  부끄러운 반복이다.      

웅크린 하늘에 무언가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뇌성이 치고... 나무가 뽑힐 듯 거센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저것이 아침나절의 맞아도 좋을 ‘비’와 같은 질감과 같은 빛깔을 지닌 ‘비’인가?

우리가 ‘비’라고 부를 만한 성질의 ‘비’가 아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베란다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다 주차된 차의 유리창이 제대로 닫혀있나 걱정되었다.

이왕 차를 살피러 내려가다 지하주차장으로 차를 옮긴다.

우산은 방향 없이 부는 바람에 살이 휘어지고 일그러졌다. 아주 잠깐인 듯싶은데 온몸이 비에 젖었다.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다시 올라오는 길... 문득 작년 여름 폭우로 지하주차장이 범람해서 차량이 손실되고, 미처 차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죽은 이들 생각이 났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 갑자기 무섭게 내리치는 장대비 아래가 지하주차장보다 더 안전한 것처럼 여겨진다. 다시 차를 끌고 원위치로 돌아온다.

결국 거센 빗소리에 차를 주차장으로 옮겼다가 다시 지하주차장에서 원래의 위치로...

처참하게 부서진 빨간 우산 하나와 빗물로 범벅이 된 안경만 남았다.


<칠월> 이란 시를 쓴 허연 시인은  “젊은 날 많이 아팠다. 미래는 없었고,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사랑은 떠났고, 차는 끊겼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릿속에 시를 쓰는 일 밖에 없었다.”라고 이야기한다. 

참 이상하다. 세상의 모든 의미 있는 글들은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이 전이되는 느낌을 준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도 많지만 사람의 가슴을 두드리는 것은 대부분 절절하고 절박하고 시린 것들이다.

따뜻한 기억보다 시린 기억이, 포근한 기억보다 서늘한 기억이, 받아들이는 기억보다 맞서야 하는 기억이 더 많아서일까... 적어도 내게 남아있는 기억들이  그렇다.

나의 부재와 나의 한계 때문인지.... 모든 것이 다 쓸려나가고 눈앞에 남아있는 것은 세상의 모든 빗물이라는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은....

쏟아지는 비. 칠 월의 비다.

'무엇을' 그리고 ' 어떻게'.... 주어진 생의 시간 속에 나는 늘 묻는다.

거침없는 세상의 모든 빗물에게도 묻고 싶은 날. 답을 해주어도 해독불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덧없이.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시인은 절망을 토로하는 듯한 '세상의 모든 빗물'이 존재하는 칠월을 그리고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로 마무리한다.

   

또다시 번개와 천등이 내리친다. 조금 전의 상황이 반복될 모양이다.

이제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갈 필요도 없다. 부러진 빨강 우산 하나 달랑 남았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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