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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리본, 나치즘의 태아를 품은 악의 상징인지도

미하엘 하케네  < 하얀 리본 >/ 2010 독일 영화상 수상

미하엘 하케네  < 하얀 리본 >/ 2010 독일 영화상 수상

나치즘의 태아를 품은 스릴러물 

              

"난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아비의 죄는 대대로 아이들이 갚을 것이다"     

     

"이상한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은 신의 의지이며 가치 있는 것이라 믿었죠"     

                                          -영화 하얀 리본 중-     

          


1913년, 독일의 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들을 교사였던 남자가 들려주는 회고담 형식으로 들려준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말을 타고 왕진을 다녀오던 의사가 집 앞에서 낙마를 당한다. 나무와 나무 사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줄이 은밀하게 설치되어 말이 줄에 걸려 넘어지고 의사는 쇄골이 부러진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지만 이 일이 추후에 벌어질 모든 일들의 암시처럼 보인다.     

의사의 아내가 죽고 의사의 일을 돕는 이웃집 산파 여자 바그너는 장애아들 ‘ 지기’를 키우며 의사의 아이 안나와 루돌프를 함께 돌본다. 의사와 산파 여자의 관계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 지기가 눈에 실명당할 정도로 참혹한 공격을 당한 후 밝혀진다.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지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강도 높게 벌어지면서 사람들은 서로를 불신하게 되고 평화로운 마을에 두려움과 의심이 싹튼다. 누가 저지른 일인지 밝혀지지 않기에 그 악은 단죄되지 못한 채 더 커져간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142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흑백으로 전개되는 영화에서 인간의 본성을 세밀하고 집요하게 파헤친다.

1913년 독일, 아마도 근대 유럽 공동체의 초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4개의 계급 남작(귀족), 목사(성직자), 농민, 의사가 등장한다. 남작은 인품이 좋지는 않지만 마을 사람의 반 이상이 그에게 고용된 형태라서 영향력이 막강한 존재다. 목사는  스스로를 ‘영적 지도자’라 칭하며 마을 사람들의 신앙을 책임지고 있지만 정작 아이들에게는 지나칠 정도의 가혹한 훈육, 하얀 리본으로 상징되는 순결성을 강조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대신 잠재적 악을 키우는 아이러니를 주는 인물이다.  의사는 산파 바그너와 불륜의 관계에 있으며, 장애아 지기도 사실은 두 사람의 아이로 추정된다. 그의 딸 안나조차도 성적 욕구 해소의 수단으로 바라보는 남자다. 소작농들은 남작의 목재소에서 아내가 사고로 죽는 일이 발생해도 일자리를 잃게 될까 봐 남작에게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못하고 항의하지도 못한다.   

   



연쇄적으로 무서운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아이들이 등장한다,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그 범죄 현장에 나타나 “도울 일이 없을까요?”라고 묻는다.

의사의 낙마 사고, 남작 영지에서 한 밤중에 벌어진 화재, 고통을 당한 지기...

 축제날 양배추밭을 엉망으로 만든 소작농의 아들, 멀리 여행 간 줄 알았던 엄마가 사실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의사의 아들 루돌프, 갓 태어난 신생아의 방 창문을 열어두어 열병을 앓게 한 친형, 자위를 한다는 이유로 악마의 유혹에 빠졌다고 팔을 침대에 묶인 채 잠드는 목사 아들 마르틴, 남자 아들의 나무 피리가 탐나 남작 아들을 연못에 빠트리고 피리를 빼앗는 소작농의 아들들.....

클라라는 신학수업시간에 아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은 뒤 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새를 새장에서 꺼내와 가위로 죽이고 아버지의 책상 위에 가위에 찔린 새를 십자가 모양으로 놓아둔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아무 연관도 없는 새에게 전가시킨다. 어리고 연역한 새를 살해한 것은 아버지가 새를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이고 그 새의 죽음으로 아버지가 고통받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목사의 딸 클라라와 마르틴은 지기가 공격당한 사건에 대해 교사가 진실을 알기를 원하지만 끝까지 자신들은 지기를 걱정하고 있을 뿐이라 항변한다.

아이들의 순수함을 의심하는 이상한 교사로 몰고 가려는 치밀한 노림수가 보인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하얀 리본'은 역설의 상징이다.  목사는 클라라와 마르틴의 팔에 하얀 리본을 묶어주며 죄와 이기심과 질투로부터 벗어나 순결과 순수를 강조한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20세기 초 하얀 리본을 아이들에게 교육 목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자녀의 팔에 하얀 리본을 두르는 것은 안에 내재된 악을 억누르고 순결해지는 것을 상징하지만 사실은 악에 잠재던 악을 발화시키는 가면으로 사용된다.  

악의, 무관심, 탐욕이 난무하는 곳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악'을 배운다. 아이들은 익명의 한 덩어리처럼 몰려다니며 악을 자행하지만 어느 어른도 아이들의 죄를 입증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폭력, 보이지 않기에 악의 뿌리를 잘라낼 수 없는 상황에서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고 바로 1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그러하기에 영화 <하얀 리본>을 가리켜 나치즘의 태아를 품은 스릴러물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미하엘 하케네 감독

 미하엘 하케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아이들 안에 잠재된 악이 어른들의 이율배반적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더 강화되는 것을 보여주고 장차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더 강한 악이 세상에 점화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아기들이 끝없이 등장한다. 태어나는 아기, 아기를 돌보는 유모... 세상의 아기들은 더없이 순수한 모습으로 오지만 언제든 악에 의해 희생될 수 있고, 악에  물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목사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죽은 새 또한 희생의 상징이다.  아무 이유없이 새는 십자가형을 당했다.  

 


1913년. 독일의 작은 시골마을이 배경이지만 섬뜩하고 낯설지 만은 않은 것은 지금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여겨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잠재된 악, 악의 발화... 전쟁, 살인, 방화, 편견, 학대, 은폐....     

팔에 ‘하얀 리본’을 두르게 함으로써  ‘악’을 억누를 수는 없다. ‘하얀 리본’을 두른 아이들은 순수와 순결을 강요받으며 가장 선한 표정으로 가장 악한 일들을 저지른다.

뉴스를 보기가 두려운 요즘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끝없이 지속되는 무기의 공급... 힘의 대결... 결국 죽어가는 이들은 영화 속 ‘어린 새’가 아닐까.

어떤 이념도 명분도 없이 단지 ‘조국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징집된 군인들은 이 슬픔의 시기를 자신의 인생에 어떤 흔적으로 기억하게 될까... 전쟁터가 꼭 전쟁 중인 곳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곳도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는 한 악이 자행되는 비극의 장소가 될 것이다.(엄밀히 말하면 이미 비극의 장소가 되었다)

며칠째 비가 그치지 않는다. 두려운 여름이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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