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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는 일

죽음의 자리를 선택하는 일

어느 사람이든지 그 자체로 완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륙의 한 부분이라.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간다면

유럽 땅은 또 그만큼 작아질 것이며,

어느 곶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이고,

그대의 친구 혹은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니라.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저 조종(弔鐘)이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그 조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영국 성공회 신부 존 던(1572~1631) meditation 17     

                                  헤밍웨이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 수록     


죽음과 삶은 야누스적인 것이다.

내 의지로 세상에 온 것이 아니듯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을 알 수 없다.

어떤 철학자들은 자살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죽음’의 선택방법이라고도 이야기하지만 죽음을 ‘적극적’으로 까지 앞당길 필요가 있을까 싶다. 어쩌면 나는 그런 능동적인 죽음을 선택할 만큼 용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최대한 늦게 찾아오길 바라지만... 죽음의 시간을 앞당기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죽음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으리라.     

강남 서이초에서 25살, 2년 차 초등교사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25살이라는 나이가 안타까웠고 2년 차 교사라는 단어가 안타까웠다. 교사가 되리라는 꿈을 품고 치열하게 공부하고 임용시험을 거쳐 교단에 섰을 그녀. 2년 그리고 25살. 충분히 설레고 두근거려야 할 나이다.     

언론에 보도되는 기사들이 어느 정도 신빈성을 갖고 있으며 어느 정도 본질에 다가가고 있는지 신뢰할 수 없는 요즘이다. 학교에서 내놓은 입장문, 교육청에는 보도 자제를 요구하는 엠바고까지 걸었다는 내용도 있고, 학부모의 갑질이 상당했다는 기사도 있고, 교원노조 측에서 내놓은 입장문도 있다.

무엇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25살. 2년 차 교사가 학교에서 자살을 했다는 사실이다.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 장소가 그녀라는 존재가 서있던 학교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어쩌면 평생을 교사로 남기를 바랐던 염원을 다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상징일 수도 있지만

교사로서 출근하던 학교에 삶의 마지막 흔적을 남긴 것은 그와는 다른 메시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뿌리내린 화분에서 자신의 뿌리를 거두는 일... 안타까운 현실이다.

죽음의 장소를 선택하는 일은... 어쩌면 죽음에 이르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날 수도 있었을 텐데 ‘학교’에서 생을 마감한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무슨 말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을 뿌리내릴 수 없게 만든 ‘화분’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서이초 교사의 죽음과는 달리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다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해병대 1사단 포병대대 소속의 젊은이가 있다. 집중호우 피해 지역인 경북 예천군에서 실종자 수색 도중 급류에 휩쓸린 사망한 20살의 청년.. 

죽음의 자리를 선택할 여지도 없이 청년은 죽음을 맞았다. 푸르고 푸른 나이. 마음껏 삶에 취해도 좋은 나이. 스물, 결혼 10년 만에 어렵게 얻은 외아들을 잃은 부모는 영정 사진 속 아들을 놓지 못한다.

젊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이 사회가 잔인하다. 오죽하면 세상의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세상살이가 쉬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그리할 수밖에 없게 만든 현실이 참담하다..


어느 사람이든지 그 자체로 완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륙의 한 부분이라.

......

그대의 친구 혹은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니라.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저 조종(弔鐘)이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그 조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젊은 그들의 죽음이 나의 일부를 쓸고 간다.

조종이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 것인지 굳이 알 필요가 없다.

그 종은 바로 나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아침이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산문집 /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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