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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내 안의 나.. 

< 글  >

    

어느 고적한 시간 

종이에 붓이 글을 쓸 때, 누가 그 붓을 움직이나?

나를 대신해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쓰나?

입술과 꿈으로 얼룩진 해변

조용한 언덕, 좁은 항만,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허리.     

누군가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내 손을 움직이고, 말을 고르고, 잠깐 멈춰 주저하고

푸른 바다일까 파란 산등성이일까 생각하면서

차가운 불길로

내가 쓰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붙태운다. 정의의 불

그러나 재판관도 역시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나를 벌한다는 것이 재판관 스스로를 벌하는 일:

실은 이 글은 아무에게 쓰는 것도 아니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 쓴다.

자기 자신 속에 스스로를 잊는다

이윽고 뭔가 살아남을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 나 자신이 된다.

               - 옥따비오 빠스 ( 멕시고 1914-1998)     


글을 쓴다

아니 글을 ‘친다’ 혹은 ’ 글을 ‘두드린다’라고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자판을 두드려야만.... 손가락으로 쉼 없이 자판의 자음과 모음의 머리를 쳐야만 화면에 무언가가 적힌다.

글은 치는 것이며, 두드리는 것이다.     

옥타비오 빠스는 말한다. "누군가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고, 내 손을 움직이게 하고, 말을 고르게 하고, 잠깐 멈추게 하는 누군가..."

나는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을 검열한다

화면에 찍히는 자음과 모음들... 단어들... 끝없이 커서의 움직임을 좇으며...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이를 재판한다.

더 이상 글이 진척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이에 대한 검열이 과도하기 때문일 것이다.     

창의성이란 검열을 거부할 때에야 간신히 솟구쳐 나오는 슬픈 것... 

어쩌면 내 속의 글을 쓰는 이에게 ‘죽은 글’을 쓰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는 글을 쓰는 이, 글을 치는 이, 글을 두드리는 이........ 수없이 많다.

모두 자기 안에 글을 쓰는 이들을 품고 있으리라.     

같은 길을 달렸다. 꼭 1년 만에 다시...

불과 몇 년 전 아무것도 쓸 수 없었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내 안에 글을 쓰는 이가 많이 아팠었다. 그가 아팠기에 나는 그에게 글을 써내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재판도 검열도 할 수 없었다. 내 안에 글을 쓰는 그가 아팠기에......

병원으로 가는 길은 많은 생각을 불러온다.

나무들도 여전했다. 그 자리에 터를 잡고 아무렇지 않게 나를 반긴다.     


11월이다. 햇살이 눈부시다. 회전문 앞에서 회전문이 나를 안으로 인도하기를 기다렸다. 

인디언식 용어로 11월은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한다.

내 안에 글을 쓰는 이가 건강하기를 바랐다.

아프지 않기를, 슬퍼하지 않기를, 생을 버거워하지 말기를...

오래도록 내 안에 살아있어 주기를....      


"아무도 부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 쓴다.

자기 자신 속에 스스로를 잊는다

이윽고 뭔가 살아남을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 나 자신이 된다."     

자기 자신 속에 스스로를 잊고... 뭔가 살아남을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 나 자신이 되는 일.... 

11월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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