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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한 해의 성적표 같은 달

한 해의 끝에 접어들면 내 인생의 성적표를 생각한다. 길게는 인생의 성적표지만 짧게는 한 해의 성적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학기의 성적. 질적인 성장과 양적인 성장.... 인내심과 배려, 열정과 사랑....      

장학금은 고사하고 지극히 평범한 평균 평점은 고사하고...

F 학점을 간신히 면한 것은 아닐까?


오래전 강의를 들으러 갔을 때 어떤 강사님 말씀이 생각난다

강의실에 오는 수강생들이 거의 같은 자리에 앉는다면서..

맨 앞에 앉는 이, 맨 뒤에 앉는 이, 중간에 앉는 이, 통로 쪽에 앉는 이, 창가나 벽 쪽에 딱 붙어 앉는 이.

강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정면인 곳에 앉는 이, 사선으로 바라보는 곳에 앉는 이...

앉는 좌석이 그 사람의 전부를 보여준다고..

그러면서 사선으로 앉는 이들이 가장 영리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나는 대부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강의 실 앞부분에 사선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방향에 앉는다. 생각해 보면 강의실 정면을 향한 내 시선이 누군가의 몸에 의해 차단되는 것을 싫어하고 누군가의 사이에 끼어 앉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강사의 말처럼 나는 자리를 잡는 데 있어서 영리한 수강생이다

다른 이에 의해 시선을 차단당하지 않으면서 오롯이 강의에 집중할 수 있고, 강의가 끝나자마자 재빨리 빠져나갈 수 있는 자리...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지 않는 것은  답답함을 싫어하기 때문이고 강의 외의 관계로 다른 사람과 얽히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이리라.

    


생각해 보면  인생 수업에서 나는 늘 사선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언제든 방해받지 않겠다는 계산, 내가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몰입하여 듣고, 보겠다는 계산, 수업이 끝나면 강의실에  남지도 않고 무언가를 바라지도 않고 바로 뒤돌아 나가버리겠다는 계산....    

하지만 인생 수업의 강의실은 내가 일반적으로 듣는 강의와 달랐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사선방향으로 멀찍이 앉아 있지만 수시로 일상의 일들이 건너왔다.

시선 방향을 가리는 일, 떨어져 앉아 있지만 옆으로 다가가서 앉아야만 하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났다.

강의가 강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버릴 수도 없었다.

인생은 강의와 강사의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강생인 ‘나'의 문제였다.


아무리 좋은 강의도 아무리 좋지 않은 강의도 듣는 이의 자세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아무리 명강의를 해도 듣는 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허한 강의가 되고 만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인생 수업... 올해 2023년 인생 수업의 종강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삐딱한 수강생이었다. 2023년 초 다이어리에 의지를 다지던 빛나던 눈빛은 사라지고 엉거주춤 비겁하고 적당하고... 그저 그런  눈빛을 지닌 수강생으로 남았다.

무기력을 탓하고 어찌할 수 없음을 탓하고.

세상의 질서, 세속의 것들이 나를 버겁게 한다고 생각했다.


2023년 종강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며 내 인생의 점수를 매기고 있을 누군가... 그분은  어떤 성적표를 내밀 것인가?

늘 사선 방향에 삐딱하게 앉아 냉소적인 분석만을 하는 어리석은 학생에게

 저 높은 곳의 그분은 내게 어떤 성적표를 내밀 것인가     

 어쩌면 f 학점 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받아들이려 한다. 나를 지켜준 것은 타고난 허기와 결핍이고 타고난 열등감 (열듬감의 다른 표현은 자존감)이다. 열등감을 은폐하기 위해 자존감을 앞세우지만 번번이 세상 앞에서 나는 열등한 학생이다.

그분이 내민 성적표에 나는 더 겸손해질 것이다. 겸손해져야 한다.

인생학교. 2023년 한 해, 겨울학기 종강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몇 칸이라도.... 성적을 만회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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