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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겨울을 붉은 것의 힘으로 몰아내는 일, 붉은 방

붉은 조화 The Dessert: Harmony in Red 앙리마티스

붉은 방의 의자에 앉아 내 안으로 끝없이 들어오려는

내 모든 마음의 겨울을 붉은 것의 힘으로 몰아내고 싶다.

"붉은 방 (디저트: 붉은 조화 The Dessert: Harmony in Red)", by Henri Matisse, 1908     


<붉은  조화>는 1908년 마티스를 후원한 러시아의 부호 세르게이 시추킨 소유의 저택 주방을 모티브로 그렸다고 한다.

초록 풀과 기하학적인 나무, 멀리 보이는  분홍 벽의 집이 있는 창밖의 풍경과 붉은 방의 색채 대비가 강렬하다.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방. 붉은 방의 여인은 붉은 생각을 한다.

 여인의 머리를 물들인 붉은 생각들이 붉은 식탁보 위로 내려앉는다. 같은 패턴의 벽지와 테이블보.. 어디까지가 벽이고 어디까지가 테이블인지  옆에 놓인 의자로 경계를 짐작한다.      

짙은 푸른색의 가지가 식탁에서부터 벽면으로 확장되어 있다. 언뜻 보면  붉은 방이 하나의 거대한 화병처럼 보인다. 원근법이 무시된 온통 붉은 것들의 방. 온통 붉은 것들 속에 사물들이 있다. 작은 꽃이 꽂힌 화병, 비네거가 담긴 목이 긴 유리병,  입체감하나 없는 정물들, 단조로운 배치, 붉은 방 안의 정물들. 여인도 하나의 정물처럼 보인다. 단정하게 올린 갈색 머리, 검은색 상의와 하얀 에이프런을 여인은 식탁을 차리는 중이다.


우리는 여인을 본다

붉은 방 안에서 붉은 생각으로 물든 여인을.

절도 있고 정밀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저 여인의 손길과 몰입의 표정을..     


나는 가끔 저 빈 의자에 앉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붉은 것들의 방. 측면에 놓인 저 의자에 앉아

나도 정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붉은 방의 의자에 앉아 내 안으로 끝없이 들어오려는

내 모든 마음의 겨울을 붉은 것의 힘으로 몰아내고 싶다.      


 분노, 증오, 오한, 공포, 강요된 힘겨운 노고

이 모든 겨울이 나의 존재 속으로 들어오려 한다.

그러면 내 심장은 극지의 지옥에 뜬 태양처럼

얼어붙은 붉은 덩어리일 뿐이겠지. “


< 가을 노래 >중에서 발췌 /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     


어떤 생의 무게가 느껴질 때, 아무렇지 않은 사소함이 거대한 짐으로 다가올 때..

끝없이 관통해야 하는 이 시간들이 마치 중력을 이겨내야 하는 것처럼 버거워질 때.     

심장이 극지의 지옥에 뜬 태양처럼 얼어붙은 붉은 덩어리가 되게 하지 않으려면

끝없이 역동적인 붉은 기운을 불러들여야 한다. 

    


저 붉은 방에도 어둠이 내릴 것이다.     


< 어두워진다는 것 >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 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 나희덕 -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붉은 방에게 마지막 햇살을 건네줄 때 붉은 방의 여인은 불을 밝힐까.

멀리 초록이 보이는 창을 닫고 어둠이 붉은 방을 삼키지 않도록... 그 이글거리는 붉은 것들로 마냥 뜨거운 시간을 가만, 가만, 가만히 쓰다듬어 줄까.

하얀 에이프런을 풀고 비로소 붉은 식탁의 주인공이 되어  턱을 괴고 앉아 붉은 것들이 만들어낸 붉은 어둠을 바라보게 될까. 비로소 금이 간 마음들을 쓰다듬어 볼까.

          

2월이다. 입춘을 지났고 비가 내린다.

꽃이 한 개밖에 피지 않은 동백을 밖으로 내놓았다. 붉은 입술을 내밀어 봄을 쪽쪽 빨아들인다

붉은 방, 온통 붉은 방 안에서 일어나는 봄의 기적을... 동백이 만들어 내는 그 붉음의 기적을 생각한다.

이 봄을 잘 견디려면 끝없이 붉어져야 한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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