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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 수동과 능동, 태워지는 것과 태우는 것

<명상하는 철학자> 렘브란트

나의 고독은 벌써 준비되었다.

그것을 태우려 하는 것을 태우려고

- 루이 에미애 『불의 이름』       

   

                       1632년 렘브란트 <명상하는 철학자>



나선형 계단을 사이에 두고 빛과 어둠의 경계가 있다. 철학자는 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있다. 철학자의 모습 외에 그 앞에 놓인 사물들은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꼭 보여주어야 할 것에만 빛을 강화시켰다.

철학자의 책상, 책상 위의 두툼한 책, 손을 맞잡고 깊은 생각에 빠진 철학자     

이 작품을 처음 볼 때는 나선형 계단과 창가의 철학자의 모습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찬찬히 오래도록 들여다보면 나선형 계단 아래 불을 피우는 누군가가 있다.

빛과 어둠, 철학자는 빛 아래에서 명상을 하고 누군가는 어둠 아래에서 불을 피우는 노동을 한다

나선형 계단을 사이에 두고  철학자는 창가의 빛을 이용하고 누군가는 불을 피워 빛을 만들어낸다.

끝없이 장작을 태우는 일, 태워서 불꽃을 일으켜 세우는 일

끝없이 불꽃 안에 자신을 마른 장작처럼 쪼개어 넣어 불꽃이 타오르게 하는 일

수동과 능동, 태워지는 것과 태우는 것     

노동이 필요 없는 빛(햇빛)과 누군가의 노동을 담보로 하는 빛 (온기) 사이에 절묘하게 나선형 계단이 존재한다.

           

조르즈 상드 < 콩쉬엘로 : Consuelo)>      


“ 나는 때때로 이 아름다움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만일 내가 그 비밀을 타인의 영혼에 이입시키려면 그것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무엇이라고! 색깔도, 형태도, 순서도, 빛도 없이, 외부의 대상이 눈과 정신에 말을 거는 모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화가만이 내게 대답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다.

  화가는 저 렘브란트의 <명상하는 철학자>를 생각할 것이다. 그림자 속에 따로 떨어져 있는 저 커다란 방, 끝없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르는 저 계단, 그림의 저 어스름한 빛, 어렴풋한 동시에 뚜렷한 모든 광경, 결국 밝은 갈색과 어두운 갈색으로만 그려진 주제 위에 펴져있는 강한 색채, 저 명암법의 마술, 하나의 의자라든가, 물통이라든가 혹은 구리 그릇 등 아주 하찮은 것들 위에 안배된 빛의 희롱 그러나 볼 가치도 없고, 더욱이 그릴만한 가치도 없는 것들이 눈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고 그것들 나름대로 아름다운 것이 되어, 존재하고 또 존재할 만한 가치 있는 것이 되고 있다. “

                                                                                   『촛불의 미학』 31~32 인용         



장 드 보셰르 <어두운 사람의 마지막 시편>

     

나의 사상은 불 속에서 사라졌다

그것으로 하여 내가 알게 된 껍질

그것들은 불 속에서 타버렸다

내가 종자이며 영양분이기도 한 화재 속에서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그렇지만 나는 이미 없다          


철학자는 장 드 보셰르의 시편에 나오는 시구와 같은 모습이다

철학자의 사상은 불 속에서 사라지고 그로 인해 알게 된 껍질도 불 속에서 타버렸다.

종자이며 양분이기도 한 화재 속에서 철학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미 없음을 확신한다.

     


어둠 속의 빛, 창가의 철학자, 나선형 계단 이것만으로도 <명상 중인 철학자> 이미지를 드러내기 충분할 터인 테 램브란트는 왜 나선형 계단의 아래 철학자와 정반대적 위치에 불을 피우는 이를 그려 넣었을까?

어쩌면 바로 그 점이 거장 렘브란트의 힘이 아닐까

대비되는 두 사람의 모습.. 

창가에 있는 철학자의 사상도, 사상을 포장한 껍질로 타버렸다.

사상이 타버린 철학자는 햇빛 아래 있다.  그를 감싸고 있는 호두껍질 같은 깊고 짙은 어둠 속에...

달리 무엇을 할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명상뿐


성별을 알 수 없는 누군가는(그의 아내 혹은 하녀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중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 짙은 어둠 아래에서 끝없이 잠자는 불꽃을 깨우며 철학을 한다.

온몸으로 몸을 움직여 명상을 하고 몸을 움직여 철학을 하는 거룩함이 나선형 계단의 아래에 있다.

나아가 철학자의 명상을 지속하게 해주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걸쳐진 불의 다리

존재와 비존재의 끊임없는 공존

<불꽃> 로제 아슬라노의 시


햇빛 내리쬐는 창가에 앉아 고상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명상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 구부러진 나선형 계단아래, 이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업을 하는 이, 거의 어둠에 갇혀 그가 만들어내는 불꽃이 아니라면 존재자체도 알지 못하였을 그 어둠 속에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이가 있다. 

철학자가 두 손 모르고 눈을 감고 햇살을 모아 명상을 하는 동안 끝없이 불꽃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선형 

계단으로 오르내리며 장작을 가져올 누군가... 장작을 가져와 부지깽이로 쉴 새 없이 불꽃을 다듬어 줄 누군가...

명상 중인 철학자보다 나선형 계단 아래 누군가의 모습에 더 시선이 가는 아침이다. 

나는 그 사람이고 싶다......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이룰 수 없어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더라도  끝없이 반복하는 노동이 도리어 제대로 된 명상다운... 그런 사람으로, 그런 모습으로,


유한한 삶이라는 생각을 부쩍 하게 되는 요즘이다

벌써 2월의 끝이다. 한 해의 2달을 먹어치워 버렸다.... 

올해는 잉여처럼 하루가 더 붙어있다. 맞아도 좋을 봄비가 약간씩 내리고 있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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