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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한다. 출발했다. 전진한다. 영혼의 속도를 느낀다

장 폴 사르트르 <말> 과거가 아닌 미래가 나를 이끌어간다.


나는 출발한다. 출발했다. 전진한다. 엔진이 으르렁거린다. 달리는 내 영혼의 속도를 느낀다.....


겨울은 얇은 빙판 밑으로 발을 빠지게 한다./

얼음밑은 낭떠러지/ 그대의 쾌락의 얇은 표면도 그러하니/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가라. 힘껏 닫지 말아라

- 피에르 샤를 루아


1964년 노벨 문학상 선정

사르트르의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자유정신과 진실 추구사상, 그리고 풍부한 지식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스웨덴 한림원.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


1964년 10월 22일, 사르트르의 회고록 <말>이 노벨 문학상에 선정되었으나 사르트르는 노벨상의 서양 편중과 작가의 독립성 침해, 문학의 제도권 편입 반대 등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하였다. 이는 노벨상을 거부한 최초의 사건으로서 20세기 프랑스 최고의 지성, 사르트르의 명성을 한층 드높여 주었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글짓기를 위해서였다.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쁨을 알았다. “


<말>은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사르트르가 외조부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낸 유년 시절로부터 시작된다. 사르트르의 어린 시절은 ‘책 읽기’와 ‘글쓰기’로 채워져 있었다. 키가 작고 몸이 약했으며, 가벼운 사시안(斜視眼) 증상을 지닌 사르트르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는데 사르트르를 구원해 준 것은 할아버지의 서재였다. 문학적 교양을 가장 높은 정신 활동으로 알고 문학 교수가 되려고 했던 조부 샤를 슈바이체르의 서재는, 어린 사르트르에게는 일종의 엄숙한 사원인 동시에 놀이터였다. 독학으로 글을 깨친 사르트르는 할아버지의 서재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순간 “세계”를 만났으며, 그 세계 속에서 “인류의 지혜와 씨름”하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사르트르의 글쓰기는 일곱 살 때 할아버지와 운문의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처음에 ‘장난’이자 ‘놀이’로 시작된 글쓰기는 자신의 존재를 필연화하고 정당화하려는 “새로운 자기기만의 작업”으로 바뀌고, 나아가 “문학을 통해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고 그 결과로 자신을 구원하는” 사제(司祭)로서의 작업으로 변모한다.

작가 = 영웅으로부터 작가 = 순교자를 거쳐 작가 = 사후의 영광으로의 점진적 변화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서는 오랫동안 죽음에게, 가면을 쓴 종교에게, 내 인생을 우연으로부터 구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은 아버지가 몇 방울의 정액을 흘려서 아이 하나를 서둘러 만들어 놓고는 죽음의 길로 달아나 버린 일이었다. 한 살 때였다.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 살면서 자기의 존재는 ‘여분의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조부가 만들어 놓은 틀에 의해 생존을 위한 원초적 연극을 하며 살아간다. 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체르의 서재는 사르트르에게는 사원이면서 놀이터였다. 서재를 드나들며 책의 세계에 빠져든다.

할아버지 서재는 작달막한 고대의 유물들이 있었다. 굴껍데기처럼 쪼개지는 이 상자의 내장을 송두리째 볼 수 있었다. 창백하고 축축한 종잇장이 약간 부풀어 올라 있고 그 위에는 잉크를 빨아먹어 버섯 냄새를 풍기는 검은 줄이 온통 가늘게 새겨 있었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됨으로써 책 속의 목소리들이 이제 자신의 것이 되었다.
“나는 흙을 파 본 일도, 둥지를 훑어본 일도 없다. 식물 채집을 해 본 일도, 새들에게 돌을 던져 보지도 않았다.. 오직 책들만이 나의 새들이며 둥지며 가축이며 외양간이며 시골이었다.”

그런 이유로 어린 사르트르에게 사물보다도 관념이 더 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그를 지켜보는 어른들의 감탄 어린 시선은 그가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이었고 그 거울을 통해 존재의 정당성을 확인하지만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시한다. 아버지 없는 자유는 자기 창조를 위한 바탕이기보다는 유기 상태라는 것. “그 누구의 주인도 아니었고, 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경험한다.

어떤 사명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자부할 만큼 부유하지도 않았고 욕망을 필수적으로 느낄 만큼 가난하지도 않았다. 병에 꽂힌 꽃 같은 존재, 존재의 관성도 깊이도 뚫어볼 수 없는 두께도 없었다. 무(無), 지워버릴 수 없는 투명성이었다.

뤽상부르 공원 테라스에서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소외감을 느낀 사르트르는 ‘얼마나 억세고 얼마나 날쌔며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생각한다. 진짜 육신을 지닌 영웅들 앞에서 놀라운 지식도 총기도 물거품 같다고 느낀다.

나이 일곱 살에 기댈 곳이라고는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음을, 타인의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내면화된 연극, 자신이 연출하고 배우가 되고 동시에 관객이 되는 완전한 일인극. 이 모든 상황의 해결방법은 ‘문학’에 대한 몰입이었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글짓기를 위해서였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책을 만드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 샤토 브리앙

글을 쓴다는 작업은 결국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 오직 쓰기 위해서 썼을 뿐이었다.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발견한 까닭에 언어를 세상 그 자체로 알아왔다. 언어라는 올가미로 사물을 생포하는 것. 낱말들을 교묘하게 엮어 놓으면 사물은 그런 기호 속에 얽혀 들고 그것을 사로잡았다.

뤽상부르 공원에서 플라타너스의 멋있는 허상을 꾸며보고 스스로 홀려 들었다. 플라타너스를 관찰한 것이 아니라 허공을 믿고 기다렸다. 단 하나의 형용사의 모습을 띠고, 때로는 긴 문장의 형태를 띠고 진짜 입사귀가 솟아나는 것이었다. 이 세계를 바르르 또는 초목으로 가득 채웠다. 사물의 존재만을 노리는 테러리스트다.


성령과 이런 밀담을 주고받았다.

“너는 글을 쓰리라.”그가 말했다.

“당신이 저를 선택한 것은 제가 무슨 특별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까?”

“아무 특별한 점이 없다”

“그러면 하필 제가 선택되었습니까?”

“별다른 이유는 없다.”

“제게는 그나마 글을 쉽게 쓸 재주라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천만의 말이다. 너는 위대한 작품이 안이한 글에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그렇게 하찮은 인간이라면 어찌 책을 낼 수 있는 것입니까?”

“정진을 거듭하면 된다.”

“그러면 아무나 글을 쓸 수가 있는 것입니까?”

“아무나 쓸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선택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신이시여 왜 하필 나를 선택하셨습니까? 제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입니까?"

"아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능력도, 별다른 이유도 없다면 어떻게 이 상황을 제가 돌파해 갈 수 있지요?"

" 정진을 거듭하면 된다"

"그러하다면 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그리하면 될 게 아닙니까?"

" 누구나 그리할 수 있지만 나는 너를 선택했다."

신은 내게 이곳에서 맡은 일을 하도록 나를 선택했다는 결론이다.

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니다. 다른 특별한 이유 없이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 선택했다는 것.


아무나 세상을 살아갈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그 존재가 타성적으로 보존되는 것도, 현재의 마음의 움직임이 과거의 움직임의 결과라는 것도 인정할 수 없었다. 미래의 기다림에서 탄생한 나는 눈부시게 비약했고 순간순간이 나의 탄생이라는 예식의 반복이었다. 마음의 작용을 톡톡 튀는 불꽃처럼 느끼고 있었다. 과거가 나를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 나의 잿더미에서 소생하면서 부단히 다시 시작되는 창조를 통해 나의 기억을 無에서 건져낸 것이다.... 흔히들 과거가 우리를 앞으로 밀어준다고 말했지만 나는 미래가 나를 이끌어간다고 확신했다. 나는 과거를 현재 앞에, 현재를 미래 앞에 무릎 꿇게 하였다.

자신을 별로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앞을 향해 달아났다.

그 결과 더욱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어제 내가 잘못한 행동은 그것이 어제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또 오늘대로 내일 내가 나 자신에게 가할 준엄한 판결을 예감한다. 과거와 현재의 혼동은 있을 수 없다. 청년기, 중년기는 물론 막 흘러간 지난해조차도 내게는 항상 '앙시앵 레짐'(구제도)이다. 신제도는 현재 이 순간에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리 잡지 못한다. 그런 희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나의 유년기를 지워버렸다.

열 살 때의 나는 나의 괴벽과 반복을 몰랐고 의심의 그림자도 없었다.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종알거리고 거리의 광경에 홀렸던 나는 끊임없이 탈피를 했고 나의 낡은 껍질이 하나하나 떨어져 쌓이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을 의식하며 다녔다...


뭉치고 압축된 존재. 한 손으로는 무덤을 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요람을 만지고 있는 존재였다. 그러면서도 은근하고 역겨운 권태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미래가 일어선다. 무한한 사랑이 나를 감싸고 가슴속에서는 불빛이 뱅글뱅글 돈다.

나는 얌전하게 책 읽기를 계속한다. 마침내 불빛이 꺼지고 만다. 나는 한 리듬을, 견딜 수 없는 한 충동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출발한다. 나는 출발했다. 나는 전진한다. 엔진이 으르렁거린다. 나는 달리는 내 영혼의 속도를 느낀다.....

나는 줄곧 달아났다. 외부의 힘이 내 도주의 형태를 결정하고 나를 만들었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달리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한 줄이라도 쓰지 않는 날은 없도다.”-로마 저술가 카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이것이 내 습성이요.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왔다.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저마다 자기 삶의 존재 이유를 찾아가는 것.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만들고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만든다는 너무도 당연한 공식을 사르트르는 무자비하게 전복시킨다.

출발하고, 출발했고, 전진하는 것, 엔진은 으르렁거리고... 영혼의 속도를 느끼는 것

미래를 끌어다 오늘을 살아간다. 결국 다가올 미래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재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고 사르트르는 이야기하지만 일상을 사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재로 미래를 끌어올 때 우리는 불안해진다. 미래는 희망이라기보다 형체 없는 두려움, 잡을 수 없는 뜬 구름같이 느껴진다.

저마다 역할극을 하며 살고 있다. 어린 사르트르가 외가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연극을 하는 것처럼.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예민해질 필요는 없다. 주위 사람들의 입맛을 고려하여 역할극을 할 필요는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묵묵히.


1월 들어 강한 한파 소식이 들려온다.

자꾸 나약해지는 것일까, 거센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몸을 움츠려 드는 것은...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가라. 힘껏 닫지 말아라"

가볍게 스쳐가야 할 것들이 있다. 무겁고 진중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얼음 바닥아래로 침몰하지 않도록...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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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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