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올리버를 기억하는 겨울밤, 긴 호흡으로....
지금은 어둡다. 밤의 첫 커브가 아닌 마지막 커브, 나의 시간이다. 곧 이 필연적인 어둠에서 빛이 솟을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표현을 쓰자면 변덕스러우면서도 진지하게 일을 시작한다. 내게 일이라 함은 걷고, 사물들을 보고, 귀 기울여 듣고, 작은 공책에 말들을 적는 것이다.....
메리 올리버 <긴 호흡> 서문 부분
펜과 종이 그리고 공기 한 모금이 전부인 여자
그러니까 이 공책들은 내 시의 시작인 셈이다.... 봄에 어떤 새를 보았을 때, 주소, 읽고 있는 책에서 인용한 문구, 사람들이 한 말, 레시피, 생각들..
공책에 적힌 문구나 아이디어 가운데 일부는 영영 완성된 산문이나 시로 도약하지 못한다.
.. 어쩌면 추운 날 뿌리는 씨앗일 수도 있다....
해마다 새해가 돌아오면 다이어리를 준비한다. 무언가를 적어야 한다는 사명 같은 것. 적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는 모든 것들을 붙잡기 위해....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는 공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쓰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무질서하게 사용한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인생의 책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갈 수 없다. 순서대로... 다시 앞 페이를 펼쳐 볼 수는 있지만 돌아갈 수 없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뒷 페이지를 먼저 뒤적여볼 수도 없다... 순서대로... 오직 시간이 정한 순서대로..
P46
나는 책꽂이 만드는 법을 배우고 내 방에 책들을 들여 주위에 빽빽하게 둘러놓았다. 낮부터 밤까지 책을 읽었고 완전성, 자연신론, 형용사들, 구름들, 여우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안에서 방문을 잠그고 낮이든 어둠 속이든 지붕에서 뛰어내려 숲으로 갔다.
책들....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유산은 책의 냄새라고 단정할 수 있다.
책 냄새, 나의 후각을 자극하는...
그리고 아버지가 무언가를 쓰기 위해 끝없이 두드리던 타자기 소리
나의 청각을 붙들어 놓은 감각들...
그리고 나의 망막에 찍힌 책꽂이의 책들, 오만한 표정으로 어린 나를 바라보던...
나의 시각을 훔쳐버린 내 유년의 기억...
P47
나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기술을 연마하고 확실성을 얻어갔다. 나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헤엄치는 것처럼 읽었다. 그리고 글을 썼다.
이 문장을 접하는 순간 전율이 일었다.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헤엄치는 것처럼 읽고 글을 쓰는 일...
읽고 쓰는 일이 죽지 않기 위한 사투처럼 치열하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세상을 받아들이는 나의 시각은 어떻게 달라질까.
P 49
나는 언어를 자기 기술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를 지나가는 문- 천 개의 열린 문들!-이라고 생각했다. 주목하고 사색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그리하여 힘을 갖는 수단으로..
p51
삶이 쉽다거나 확신에 차 있다는 건 아니다. 완강한 수치심의 그루터기들, 수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해결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슬픔, 아무리 춤과 가벼운 발걸음을 요구하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어디를 가든 늘 지고 다니는 돌 자루가 있다. 하지만 우리를 부르는 세상, 경탄할 만한 에너지들을 가진 세상도 있다. 분노보다 낫고 비통함보다 나은, 더 흥미로워서 더 많은 위안이 되는 세상, 그리고 우리가 하는 것, 우리가 다루는 바늘, 일이 있으며 그 일 안에 기회 –뜨거운 무정형의 생각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보기 좋고 열을 유지하는 형상 안에 집어넣는 느리고 세심한 노력을 기울일-가 있다. 신들 혹은 자연 혹은 시간의 소리 없는 바퀴가 부드러운, 휘어진 우주 전체의 형상들을 만들어온 것처럼, 곧, 나는 내 삶을 주장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일과 사랑을 통해 멋진 삶을 만들어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완강한 수치심의 그루터기들, 수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해결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슬픔, 아무리 춤과 가벼운 발걸음을 요구하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어디를 가든 늘 지고 다니는 돌 자루가 있다.... 돌 자루... 생의 무게. 도망칠 수 없는 것. 확신에 차있거나 쉽다고 말할 수 없는 삶.
삶 속으로 들어간다. 날마다, 매 순간...... 무엇을 하는지 끝없이 의심하고 의심하면서
순간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아서
검불처럼 날아가 흩어져 버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날마다 메리 올리버처럼 무언가를 읽고 무언가를 써야만 한다.
p53
이제 나이 늙은 개는 죽었고, 나는 다른 개를 갖게 되었으며 나의 부모님은 돌이 가셨고 나의 첫 세계인 그 옛집은 팔렸고, 내가 거기서 모은 책들도 팔렸거나 사라졌다. 하지만 더 많은 책을 사들였고, 다른 곳에서 판자 하나하나 돌 하나하나로 마치 집처럼 진정한 삶을 지었다. 그 모든 건 내가 여우와 시, 빈 종이 그리고 내 에너지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희미하게 빛나는 세상의 어깨들은 개인의 운명에는 무심하게 으쓱하지만 나일강과 아마존강은 계속 흐르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삶은 나의 것이다. 내가 만들었다. 그걸 가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내 삶을 사는 것. 그리고 언젠가 비통한 마음 없이 그걸 야생의 잡초 우거진 모래언덕에 돌려주는 것...
2019년 1월 17일... 메리 올리버는 잡초 우거진 모래 언덕으로 돌아갔다
날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작은 공책을 뒷주머니에 꽂고 집에서 나가 숲 속이나 바닷가, 들판을 거닐며 자연과 교감하던 시인은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언어들만 남았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삶,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적어놓은 대로 삶을 살았고.... 비통해하지 않았고
모든 자연의 순환이 그러하듯.... 야생의 잡초 우거진 모래 언덕에 자신의 삶을 돌려주었다.
2025년 새해가 시작된 지 8일째다.
한파가 몰아친다. 안전문자가 울리는 것을 보니 내일 날씨가 심상치 않은 모양이다...
어둠 속.... 유리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창밖을 바라본다...
눈이 내리고 있다. 조용하게.... 치밀하게... 방향 없이..
마치 메리 올리버가 아무 페이지나 펼쳐 생각의 씨앗들을 마구 흩뿌려놓듯...
눈의 씨앗들이 마구 쏟아지고 있다.
회색 아스팔트 위로... 한 눈이 또 다른 한 눈을 이끌고
또 다른 한 눈이 또 다른 한 눈을 이끌고..............
긴 호흡으로 메리 올리버를 읽는 밤.
눈 내린다. /려원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