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우리에게 '당신은 첫눈입니까'라고 묻는다
당신은 첫눈입니까
누군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 우리는 허공이란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
당신은 첫눈입니까 '
/ 이규리 < 당신은 첫눈입니까> 부분
어젯밤부터 시작된 폭설.... 눈이 그치지 않는다.
통유리창으로 눈이 쏟아져 내려왔다. 형식을 갖추지 않은 눈, 무형식도 형식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눈이... 뒤엉키며 부서지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날은 마음이 심란해진다.
물멍도 불멍도 아닌 눈멍을 한 하루...
저 거침없는 새하얀 몸짓.... 작은 새의 깃털 같은.
솜사탕 같은..... 허공을 가득 메운 ' 흰'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를 견딜 수 없다. 그런 날은 마치 인생에 죄를 지은 것 같은 자괴감이 든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길이를 알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
방향 없이 쏟아지는 눈이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지금은 어두운 밤.... 시야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눈이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눈송이들이 여린 가지들 위에 내려앉자마자 바람은 나무를 거세게 뒤흔든다....
이미 아스팔트를 뒤덮고... 보도블록과 도로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저 새하얀 것들...
바람이 이끄는 대로 거침없이 내달리는 모습... 무언가 두려우면서도 경이로운 모습
거룩한 것 같으면서 야만적인 모습을 보았다.
누군가에게 저 눈보라는 얼마나 견딜 수 없는 것일까를 생각하면서...
부질없음과 불확실성을 생각하는 시간....
당신은 첫눈입니까라고 시인은 묻는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당신은 나의 첫눈입니까?’ 혹은 ‘나는 당신의 첫눈입니까?’로 생각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첫눈’ 같은 기억으로 남는다는 건 축복일 것이다. 아마도...
그 첫눈이 대설주의보를 동반하지 않는 한...
‘첫’이란 단어에는 새로움과 변화가 이미 전제되어 있으니까.
‘너는 무엇을 하고 있니?’
혼자서 묻는다. 대체 무엇을....
상자 속에서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밤이 오고 밤이 가고
바람이 몰아치고 눈이 뒤집히고 밤이 밤을 놓치고
가장 아픈 형식으로
세상의 모든 창이 부서질 때
가장 아름다운 형식으로
- 백은선 < 어느 푸른 저녁 > 부분
생각해 보면 상자 같은 방이다.
네모난 방 안에서 눈 내리는 것을 진종일 바라보았다.
가장 아픈 형식으로 세상의 모든 창을 다 부숴버릴 듯... 내리는 하얀 폭력을.
밤이 깊어간다.
그 많던 새들은 또 어디에서 이 눈보라를 피할까?
가엾은 새 한 마리 네모난 방 안에 갇혀있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8
2022 아르코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빨강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