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끌고 걷고 있다.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처럼
지구를 끌고 걷는 남자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 아침, 아무도 걷지 않은 길 위로 남자가 걷고 있다. 휘청거리는 다리로 방향 없이 몰아치는 눈보라와 바람에 맞선다. 비정한 세상에 맞서고 결국 자신에 맞서려는 남자의 모습이 성지 라싸와 성산 카일라스산으로 순례를 떠나는 티베트인들의 오체투지를 연상시킨다. 전진과 정지를 꿈꾸는 두 다리는 서로 엇박자로 움직여 눈 쌓인 길 위로 지그재그 선을 그린다. 새로운 길이 생겨난다. 전진을 거부하는 다리와 제대로 펴지지 않는 손끝 어딘가에는 지구로 이어진 길고 거친 줄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오직 그의 눈에만 보이는.
대체 무엇이 바스러질 낙엽 같은 남자를 얼어붙은 길 위로 이끄는 것일까? 하얀 눈송이가 그의 머리와 등에 사뿐사뿐 내려앉는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죄로 카프카스 바위에 사슬로 묶인 채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가 떠올랐다. 독수리에게 쪼일 간이 사라져야만 고통이 중단될 터인데 간이 재생되는 한 고통 또한 재생된다. ‘미리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프로메테우스는 지상의 인간에게 불을 줌으로써 자신이 받게 될 고통을 모르지 않았으리라. 눈길을 걷는 남자는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해, 자신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프로메테우스처럼 기꺼이 형벌을 받는 것일까? 세상의 죄악이 눈처럼 하얗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순례를 지속하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짙은 슬픔이 가슴을 잠식하던 날, 날마다 재생되는 간을 독수리가 날아와 쪼는 듯한 일상이 버거웠다. 가야 할 길은 아득해 보였는데 인생의 신호등은 제때 켜지지 않았다. 그렇게 빨강도 노랑도 파랑도 아닌 회색 시간을 지나왔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여전히 잠복해 있다. 마음에 겨울이 찾아올 때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청동 조각상 <걷는 사람>을 응시하곤 했다. 사르트르가 ‘결코 걷고 있지 않아도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찬사를 보냈던 <걷는 사람>은 정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정지되어 있지 않다.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P78~79
어느 날부터인가 창밖에 자코메티의 청동 조각상 같은 남자가 걷고 있었다. 날마다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걷는 남자는 고독한 얼굴,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빛, 진행 방향으로 기울어진 상체, 제대로 펴지지 않는 한쪽 팔과 보폭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는 한쪽 다리를 끌고서 온 힘을 다해 생을 지고 걷고 있었다. 그의 등 위로 사계절이 내려앉았다. 남자의 등은 연두였다가 진초록으로, 붉은 갈색이었다가 칙칙한 갈색으로 물들었다. 찬란함과 덧없음, 생성과 소멸 사이 남자는 모든 것에 초연해 보였다.
누군가 삶에서 승자가 되지 않더라도 완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을 뒤처진 이들의 자기만족이나 변명 정도로 치부했던 기억이 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뒤로 밀려날 것 같은 불안감에 스스로 몰아세운 시간이었다. 앞서기 위한 혹은 뒤처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은 완주의 본질이 아닐 것이다. 자기만의 속도로, 숲에서 들려오는 자기만의 북소리에 집중하며 걷는 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세상의 걸음걸이에 보폭을 맞추느라 버거웠던 날들을 지나 낡고, 지친 내가 유리창 앞에 서 있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직립한다. 두 발로 대지를 딛고, 두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두 팔을 흔들며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용감하게 저마다의 생으로 전진하지만, 세상의 언어를 익히며 세상의 질서에 길들수록 비겁해진다. 그럴듯한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과장된 걸음으로 걷지만 어느 순간 세월의 무게와 삶의 무게는 우리의 상체를 기울어지게 만들고 고개를 수그리게 하고 어깨를 왜소하게 만든다. 눈빛을 수시로 흔들리게 하고 두려움과 불안 속에 생각은 길을 잃고 방황하게 한다. 두 눈이 무언가를 응시할 수 없게 되고, 두 발로 걸을 수 없게 되고 나를 은폐할 페르소나가 필요하지 않은 날, 대지와 몸은 수평이 된다. 갈등과 번민마저도 대지에 파묻혀버릴 그날은 영원히 직립을 포기하는 날이 될 것이다.
눈 쌓인 나무가 검은 몸통을 흔들며 춤을 출 때마다 남자가 낸 길은 다시 하얀 눈으로 뒤덮인다. 그러나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아픈 몸을 끌고, 주어진 생을 끌고, 비움의 나무를 끌고, 얼어붙은 길을 끌고 간다. 길 위에 내려앉은 슬픔과 고통, 절규와 환희, 거룩한 비애를 끌고, 마침내 거대한 지구를 끌고 간다. 지구 안의 탐욕, 편견, 이기심, 모든 혼돈과 무질서를 끌고 걷는 남자의 그림자가 눈길 위로 길게 드리운다. 그림자가 거대한 청동 조각상처럼 보인다.
남자가 힘겹게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저마다의 무언가를 끌고 사람들이 뒤따른다.
강아지를 끌고, 유모차를 끌고, 수레를 끌고... 수많은 발자국이 눈 위에 찍힐수록 길은 넓어진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이들이 함께 지구를 끌고 간다. 오래전부터 내게 ‘걷는 사람’이 된 남자를 창밖으로 바라보는 대신 오늘은 그의 뒤를 따라 걷고 싶다.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지 않고, 몸을 움츠리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고 스스로 걷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서둘러 계단을 달려 내려간다. 겨울 햇살 사이로 간간이 눈발이 날리고 있다. / 계간수필 겨울호 / 통권 118호 수록/ 려원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 <겨울산> 부분 황지우
겨울은 견디는 계절이란 생각을 한다. 발톱을 감추고... 최대한 몸을 수그려... 도약의 순간이 올 때까지 침잠하는 계절... 산책로에서 마주치는 남자, 폭설에도 굴하지 않고 바싹 마른 낙엽 같은 몸을 이끌고 걷는 남자를 보았다. 자코메티 작품 속 <걷는 사람> 같은 남자의 몸 어딘가에 지구로 이어지는 끈이 있으리라. 거대한 지구를 끌고 가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자가 아닐까. 아픈 몸을 끌고, 주어진 생을 끌고, 비움의 나무를 끌고, 얼어붙은 길을 끌고 간다. 길 위에 내려앉은 슬픔과 고통, 절규와 환희, 거룩한 비애를 끌고..... 마침내 거대한 지구를 끌고... 지구 안의 탐욕, 편견, 이기심, 모든 혼돈과 무질서를 끌고....
남자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을 후려치는 질문 '나는 무엇을 끌고 가고 있는가? '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생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생에 끌려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빨강 수집가의 시간> p117~
바넷 뉴먼의 작품 속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은 언저리로 밀려나 흔적적인 노랑, 겨우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위태로운 표정의 파랑, 오만하리만큼 강렬한 빨강이 존재한다.... 삶의 빨강을 지키지도 못하고 삶에서 어찌어찌하다 밀려난 노랑과 파랑을 붙들지도 못한다. 빨강을 감당하지 못하고, 붙잡아야 할 것을 붙잡지도 못하면서 인생의 시간은 가고 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심장을 강렬한 빨강에 담아두었다.
오래전부터 내게 ‘걷는 사람’이 된 남자를 창밖으로 바라보는 대신 오늘은 그의 뒤를 따라 걷고 싶다.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지 않고, 몸을 움츠리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고 스스로 걷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서둘러야겠 다.. 이 세상에 세 들어 사는 우리에게 '고통'은 월세와 같은 것이 아닌가...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