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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바람처럼 옵니다. 헐벗긴 채로, 잉크로부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쓰기> / 알랭 비르콩들레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쓰기> / 알랭 비르콩들레

“중요한 것은 쓴다는 거죠.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포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그 글쓰기를 아주 멀리, 어둠으로 데려갈 줄 알아야 합니다.”


알랭 비르콩들레는 해외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에 대한 명실상부한 전기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마르그리드 뒤라스에 대한 석사논문을 썼다. 1972년 10월 처음 만나 1974년까지 뒤라스를 만났는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쓰기>는 생의 마지막을 앞둔 뒤라스를 위해 썼다.


그녀는 아무런 예고 없이 특유의 거친 태도로 불쑥 말했다.

“만약 우리가 글을 쓰고 싶다면 그건 절망에 빠져 있기 때문이죠. 만약 우리 스스로 중요한 모순을 잊어버린다면, 또 끊임없이 이 모순 속에서 살지 않는다면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어요. 한낱 이야기꾼은 될 수 있을 겁니다. 모순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어요. 안이함에서 오는 역겨움만 있을 뿐이지요.”

1972년 10월 어느 날, 오후 4시였다. 날씨는 잔뜩 찌푸렸었다.

생브누아 거리에 있는 뒤라스의 서재는 회색빛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새로운 어떤 것이 내 속에서 일어선다... 그것은 글쓰기의 비밀과 세계를 읽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장소의 비밀과 영혼의 뮤지카(음악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였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을 둘러싼 어둠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어야 하는 사소한 것들, 빈손으로, 무념으로, 맨몸으로 들어가는 용기, 단지 “바람처럼 일어나서”, 우주의 심연 속으로 재빨리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가 곧바로 옮겨 써야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이 밤을 향해 가는 용기와 같은 것들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뒤라스가 나를 맞이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를 주제로 삼은 석사학위논문 때문에 그녀를 만나러 왔다. 그녀가 막 <사랑>을 출판했을 무렵이다.


그녀는 내게 문 없는 옷장을 보여주었다. 그 속에는 제본된 원고들과 그녀에 대해 미국 대학에서 쓴 연구 결과물들이 버려져 있었다. 그녀는 이 버려진 더미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것이 일어나는 장소와 시간은 다른 곳, 다른 순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쓴다는 거죠.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포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그 글쓰기를 아주 멀리, 어둠으로 데려갈 줄 알아야 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지성의 시간에 있지 않다는 것이죠.”

뒤라스는 우아하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았다. 무연탄 색깔 비슷한 회색 두꺼운 스웨터, 검고 흰 불규칙한 바둑판무늬가 있는 치마. 남성적 느낌을 주는 신발, 그러나 그녀의 시선에는 놀라운 지성과 예리한 청력과 시력이 담겨있었다. 근시 안경 렌즈 너머까지 소름을 돋게 하며 입을 다물도록 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작가나 광인들은 똑같이 팽팽한 줄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아요.”

뒤라스는 모든 에너지를 작품 속에 쏟는다. 글쓰기라는 불가항력, 환영을 추구하는 것, 그녀를 괴롭혀 그녀로 하여금 끝까지 가도록 만드는 상상의 세계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인상을 주면서 모든 것은 작품 속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녀의 광채는 태양처럼 환하지 않다. 오히려 밤 혹은 황혼에 나타나는 어떤 것이다...


그녀는 마치 도전할 때 느끼는 것처럼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간다.”라고 즐겨 말했다. 자발적으로 혼자 절망에 잠겨 타인의 침묵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를 게걸스럽게 조소했던 사람들의 빈정거리는 듯한 비웃음과 지옥으로 추락하는 것에 대해 썼다.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은 자신의 끝까지, 자기 힘의 끝까지 가서 그것을 글쓰기의 정수 속에서 다시 찾는 것이다.

글은 바람처럼 옵니다. 헐벗긴 채로, 잉크로부터 오는 것이죠. 그것이 글입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도 삶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지나가지요. 삶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지나갑니다. ”


그녀는 항상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던 유일한 사람들인 미친 사람들을 편애하고 있었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것, 광기가 바로 그것이죠. 그것이 거짓과 진실을 유일하게 지켜주는 것이죠. 거짓과 진실, 어리석음과 지성을 판단하는 것이 광기입니다.”

글을 쓰는 각각의 주체는 자기 내부에 모든 것이 살아가고 체험의 통합성이 모이며 혼합되는 그늘진 지대를 소유한다. 이것이 바로 뒤라스가 말하는 ‘내적 그늘’이다.

나는 그녀를 1972년부터 1974년 사이에 자주 만났고 그녀 덕분에 석사논문도 진전이 있었다.


1994년 겨울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글쓰기라는 불가사의가 앞으로 나아가지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앞으로 나갑니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해요.”

그녀는 모든 것이 자신을 벗어나는 질서 속에, 심지어는 세상을 벗어나기까지 하는 질서 속에서 통제 없이 만들어진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글을 쓰는 것만이, 금빛 나는 펜의 소리를 듣는 것만이, 종이 위에서 서걱거리는 소리만이 중요하다. 그리고 비밀스러운 질서가 전개된다.

생브누아 거리, 노플 르 샤토, 로슈 누아르 그녀 작업의 핵심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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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수집가의 시간> p289 나와 함께 내 얼굴로 들어와요 중에서


노플에서 그녀는 얀 앙드레아에게

“오세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라고 답한다. 보이지 않게, 사건의 흐름을 변화시키면서

마치 삶이 다른 곳에, 어떤 다른 흐름 속에, 다른 구덩이에 자리 잡은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극도의 긴장 속에, 갑자기 모든 것을 흔드는 어떤 파괴의 순간에 달린 것 같은 방식 말이다.


그녀 속에는 항상 뒤라스라는 스스로의 존재가 지닌 역동성을 대변하는 두 단어가 있었다. 그 두 단어는 ‘파괴하라’와 ‘태어나라’이다. 삶에 대한 명백한 성향과 “내가 한 모든 일을 부숴버리는 ‘ 이 격렬한 방식에 대해 그녀는

내가 앞으로 나간다고 하는 것은 내가 한 것을 파괴한다는 뜻입니다.”

“시간을 다시 그려야 합니다. 처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의 언어가 되돌아오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불확실성만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목소리..

“글을 쓴다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그 나머지, 존재, 예전의 호기심, 논쟁, 토론, 그리고 심지어 만남까지도 더는 관심을 끌지 않아요. 모든 것은 이제 가지치기되고, 비워집니다. 글쓰기가 자리 잡은 그 본질에까지 가야 합니다. 그 후 모든 것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그곳에 멈춰 서서, 그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그것을 재빨리 파악하기 위해 바싹 뒤따라야 할 테죠.”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이라는 작품에서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파괴한다'는 단어와 '태어난다'는 단어를 모두 지닌 그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결국 내가 지닌 것, 내가 이룬 것, 내가 쟁취한 것을 모두 파괴하는 것

글을 쓰는 일이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춰버린 느낌이 드는 것.

이제 겨우 1월... 다시 새해를 맞았는데

마치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막막함에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쓰기>를 읽는다

광기 어린 에너지와 그녀 안의 내적 그늘이 잘 어우러진 삶...

중요한 것은 쓴다는 거죠. 자신과 함께 그 글쓰기를 아주 멀리, 어둠으로 데려갈 줄 알아야 합니다.

글쓰기를 밝음이 아닌 '어둠'으로 데려갈 줄 알아야 한다는 말과

"만약 우리가 글을 쓰고 싶다면 그건 절망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와닿는다.

안이함에서 오는 역겨움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나의 절망과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새해를 맞는 날...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간다.”

뒤라스의 말에서 위안을 얻는 시간이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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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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