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간의 얼굴은 침묵과 말 사이의 마지막 경계

Le Scribe Accroupi 이집트의 서기상 4500년 동안의 침묵

Le Scribe Accroupi 이집트의 서기상


이집트 서기상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 서기는 파라오 곁에서 파라오와 그의 주변인들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기록하는 상당히 지위가 높은 공무원이었다. 고대 이집트에 대해 남겨진 기록들은 대부분 서기가 남긴 것들이다. 문자를 자유자재로 쓰는 이들이 적었기 때문에 이집트 사회에서 사제나 고관에 버금가는 명망과 권세를 누렸고 초기에는 독점적, 폐쇄적 집단으로 후손에게 직이 전수되었으나 중왕국 시대에 이르러 서기 양성학교가 생겨났다.

서기의 업무 범위는 세금 징수, 임금 지급, 작업 감독, 수확량 측정, 곡물과 재료의 재고 파악. 생산량의 종류와 수량, 부장품 내역, 망자에게 봉헌되는 공양물 목록, 건축 자재와 공구 거래 내역 등으로 상당히 광범위했다.

이집트 서기상.jpg

서기상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 무언가를 받아 적을 준비가 되어있는 자세와 눈빛, 갈대펜을 쥐고 있었을 손, 진지한 얼굴로 기록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19세기 이 석상이 발견됐을 때 인부들은 4500살이나 된 석상의 눈빛이 너무도 생생해서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이집트 사카라(Saqqarah) 지역에서 발견되는 석상들 대부분이 이렇게 선명한 눈빛으로 조각되어 있다.

석상을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석상의 눈동자는 흰색의 가운데에 수정을 끼워 넣은 것인데 살아있는 인간의 눈과 거의 동일한 해부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크리스털 구 안쪽에 검은 점이 동공처럼 찍혀 있어서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의 얼굴과 침묵>

인간의 얼굴은 침묵과 말 사이의 마지막 경계선이다.

인간의 얼굴은 말이 튀어나오는 벽이다... 침묵은 얼굴 속 어디에나 있다. 침묵은 얼굴의 각 부분들의 밑바탕이다.
두 뺨은 양편에서 말을 가려 덮고 있는 두 개의 벽이다. 그러나 바깥을 향한 콧날의 가파른 움직임에서는 두 뺨의 표면 사이에 함께 모여있는 말들이 바깥으로 나올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보인다. 이마의 궁륭에서 침묵은 외부로 나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슬처럼 내부로 방울져 내린다.

두 눈 – 그 열린 두 틈에서는 말 대신 빛이 나온다. 그것은 얼굴 안에 모여있는 침묵에게 밝음을 가져다준다. 그렇지 않다면 침묵은 어두워지고 말 것이다.

입 – 그것은 마치 제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침묵의 강요에 못 이겨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충만된 침묵이다. 말을 통해서 긴장을 완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침묵은 얼굴을 파멸시킬 것처럼 보인다. 마치 침묵 자신이 입에게 말들을 속삭여주고, 그리고서 입이 말을 할 때면 침묵은 자기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침묵하고 있을 때면 입의 윤곽은 마치 한 마리의 나비가 날개를 접고 있는 것 같고, 그러다가 이윽고 말이 시작되면, 그 날개를 펴고 나비는 날아가 버린다.


침묵으로부터 말이 생긴다 해도 침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으며, 오히려 침묵은 말에 의해서 그 밀도가 높아지고 그렇게 밀도가 높아진 침묵에 의해서 말 자체도 더욱 커진다는 점이다.


얼굴에 침묵이 결여되어 있다면 얼굴은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살풍경해지고 도시화된다. 얼굴은 자기 자신에게 장악당한다. 마치 한 도시가 자연의 풍경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장악당하듯이

“오늘날 인간의 얼굴에는 어떠한 바다도 어떠한 산도 없다. 얼굴이 더 이상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에게서 밀어내버린다. 얼굴에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뾰족한 극단에 놓이게 되고 외부세계는 그 뾰족한 극단에서 떠밀리고 흔들려서 떨어질 것처럼 보인다. 얼굴에서 나무들이 베어지고 산은 파여 없어지고 바다는 말라붙었다. 그리고 그러한 텅 빈 얼굴 속에 거대한 도시가 세워졌다.

인간의 얼굴과 침묵 /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이집트서기상1.jpg

예전에 한 인간의 얼굴 속에 깃든 침묵의 힘은 아주 컸다. 인간의 얼굴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그 침묵에 흡수되었다. 그 때문에 세계는 언제나 사용되지 않은 채로 소모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막스 피카르트

이집트 서기상 /


이집트 사제의 얼굴은 고대의 침묵을 보여준다.

인간 얼굴에 새겨진 침묵, 침묵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이 풍경은 인간 얼굴의 형태를 만들 수 있고 풍경이 가진 힘들이 인간의 얼굴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가부좌를 하고 있는 서기상, 형형한 눈빛으로 말보다 더 말다운 침묵을 보여주는 그에게서..

그가 누구인지도...

그가 얼마나 유능한 서기였는지도..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도

그를 만든 이 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지만 4500년을 거슬러 약탈당한 유물이 되어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유리안에 수용되어 있는 그를 만난다. 아주 오래전 인간의 얼굴에 새겨진 침묵의 힘을 본다. 느낀다.


“오늘날 인간의 얼굴에는 어떠한 바다도 어떠한 산도 없다. 얼굴이 더 이상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에게서 밀어내버린다. 얼굴에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뾰족한 극단에 놓이게 되고 외부세계는 그 뾰족한 극단에서 떠밀리고 흔들려서 떨어질 것처럼 보인다. 얼굴에서 나무들이 베어지고 산은 파여 없어지고 바다는 말라붙었다. 그리고 그러한 텅 빈 얼굴 속에 거대한 도시가 세워졌다."

막스 피카르트의 이 말이 와닿는 아침이다.

오늘날 우리의 얼굴에서 바다도 산도 사라져 버린. 나무도 베어 없어지고

회색동굴처럼 텅 빈.... 그러나 그 자리에 인공적인 호수와 빌딩, 인공숲이 세워진 타인의 얼굴들을 본다.

노화에 반발하고 분노하며 끝없이 얼굴에서 거룩한 침묵을 삭제해 가는 우리들의 천박한 모습을....


눈발이 날린다. 하루종일 내릴 모양이다.

길 위로 소복이 쌓여가는 새 하얀 겨울의 침묵들.

서기의 얼굴에서 마주한 침묵을 눈 위에서 확인한다./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산문집 2024.12

20241228_165438.jpg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산문집 2022

20241226_170938.jpg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나는 오직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