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소진되는 것 결국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겨울은 길었고 우리는 걸었지>
김이강
더이상 수선을 할 수 없을 만큼 낡아버린 코트가 내겐 한 벌 있지
짙은 녹색이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산책을 나가야지
오늘은 긴 잠을 잤어
오래 뒤척이지 않고 멈추지 않는 꿈을 꾸면서
...
바람이 많이 불어왔지
그날도 코트를 입었어
낡아버린 코트
모든 게 끝이 있지
응 모든 게 끝이 있지
스무 살처럼 푸른 나이도 푸른 관념도 푸른 희망도
응 모두가 희미해지지
붉은 고통도 선명한 사랑도
<겨울은 길었고 우리는 걸었지> 부분
2월의 첫날 겨울비가 내렸다
상당히 오래도록... 이른 새벽부터 지속적으로 내린다
간밤내 몸이 안좋아 뒤척이다 병원에 다녀왔다. 2월 첫날, 그것도 토요일 아침..
번호표를 뽑고 대기... 갈 때도 내렸고 돌아올 때도 내렸다. 비에 젖은 사람들, 비에 젖은 거리...
사람은 참 이상한 존재.
몸이 건강할 때는 생이 나른하고 지루해지는데
조금이라도 몸이 안좋으면 갑자기... 생에 최선을 다해야할 것 같은 의무감에 젖는다.
오늘은 산책도 외출도 안할 작정이다.
밤새 시달렸으므로..
김이강 시인의 시 < 겨울은 길었고 우리는 걸었지 >에 등장하는 낡은 코트
나도 버리지 못하는 코트가 여러벌이다.
단 한번도 꺼내입지 않으면서... 결코 버리지 못하는 낡은 초록 코트...커다란 붉은 장미가 수놓아진 검정 밸벳코트...양모코트...새빨간 코트...지금은 그 많은 코트들은 그대로 방치한채 교복처럼 빨간 더플 코트하나로 겨울을 나고 있다. 마치 코트가 한 벌 밖에 없는 사람처럼
모든 게 끝이 있지
응 모든 게 끝이 있지
스무 살처럼 푸른 나이도 푸른 관념도 푸른 희망도
응 모두가 희미해지지
붉은 고통도 선명한 사랑도
모든 게 끝이 있다는 것을 안다. 모든게 끝이 있을 거라는 것을
지난날의 푸른 것들도 희석되고 가슴을 파고들던 붉은 고통도
투명한 눈물도 사라진다.
우리의 기억 속에 희미해져가는 남자, 로베르트 발저의 글을 읽는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손에>
우리는 알지 못하는 손에
붙들린다. 기분 나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언젠가 그렇게 되어야 했던 것이라면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부드러운 불행이 희미해져가는구나.
어느 날 더는 이곳에 있지 않던 사랑은
저기에도 없고, 어디에도 없구나, 그리고 나는 혼자 물었다
....
다가왔던 모든 날들과 사라진 날들에 아직도
기억했던 마음이 잊힐 때까지
점점 사라지는 음과 같은지.
기억은 소진되는 것
결국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누구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오로지 저절로
생겨나, 시간과 함께 커졌다가 사라지고 마는구나.
우리는 알지 못하는 손에 이끌려 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아무리 자유의지로 몸부림쳐도
끝없이 몰려오는 불안으로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는 것은
내 자유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 것들 때문이 아닌가.
겨울비가 내리는 것도... 내 예측 밖이듯........
다가왔던 모든 날들과 사라진 날들에 아직도
기억했던 마음이 잊힐 때까지
점점 사라지는 음과 같은지.
기억은 소진되는 것
결국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때 좋은 사람들이 나를 보았던 그곳>
한때 좋은 사람들이 나를 보았던 그곳.
그곳에 이제 나무들이 푸르러가고
노래하고 짹짹거리는 덤불 옆으로, 기차가
나지막이 지나간다. 내가 여기서 일을 망칠지도 모른다.
....
나는 산문에서 산문으로 미끄러지고
그것으로 한때의 내 모습을 숨긴다,
원치 않는 감상이 내게 찾아올 때면
언젠가 내눈에 들어왔던 마차들이
내 아름다운 마차들이
내 아름다운 존재의
초록빛 수풀 옆을 지나간다, 내가
기이한 나 자신의 삶의 여정을 쫒아가는 동안
산문에서 더 작은 산문들로
나는 그렇게 미끌어진다, 마치 배를 탄 것처럼,
그리고 배가 내게 그렇게 행한 것처럼.
앞마을에서는 수탉 한 마리가 유쾌한 목청으로 울고
나는 내가 여기서 일을 망친 걸 깨닫는다.
기억이 소리없이 다가올 때,
나는 재빨리 여기에 그것을 숨긴다.
내 인생의 푸르른 수풀 옆으로
나는 산문쟁이의 숲을 타고 지나간다.
로베르트 발저 < 희미해져가는 사람, 발저의 마지막 나날>
나는 산문에서 산문으로 미끄러지고
그것으로 한때의 내 모습을 숨긴다
....
기억이 소리없이 다가올 때,
나는 재빨리 여기에 그것을 숨긴다.
한 때 나를 알던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한 때의 내 모습을 무성한 덤불 속에 숨기고 싶었을 때도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마음이 들때가 많다.
기억이.... 부패하지 않은 기억이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올 때
한 때의 내 모습을, 나를 둘러싼 이들을..
지금은 세상에 없는 이들을 생각한다.
한 때의 내 이야기들을 하려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들을 부패하지 않은 기억 속에서 불러와야 한다.
아직 비 내린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커다란 통유리 창이 있는 옥탑방에서.. 나는 작은 박새 한마디 비를 피해 날아가는 모습을 본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르면 김이강의 시와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을 읽고
비에 젖은 박새와 회색 겨울하늘을 바라보던 이 시간의 나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까....
기억은 소진되는 것
결국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는 아닌 지금은 아닌 나는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아무 존재도 아닌...
그리고 반드시... 언젠가 사라질 ............../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아르코 문학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