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스산해지는 날 더 스산해지기 위해 푸른 기형도를 부른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입 속의 검은 잎>> 시작 메모 1988년 11월
기형도
1960년 3월 경기도 웅진군 연평리에서 태어남
1985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중앙일보사 정치부, 문학부, 편집부 기자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3월 7일 새벽
첫 시집 출간을 눈앞에 두고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였다. 그해 5월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출간
만 29세.. 푸른 나이에 그의 시작 메모처럼
믿음이 언제가 자신을 부르면 기꺼이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다더니 바로 그날이었나 보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어느 푸른 저녁>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 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
어느 투명한 저녁
...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거리의 방랑자 같은 남자, 그가 긴 코트를 펄럭이며 걸었을 어느 푸른 저녁.
사람들은 서로를 관통해서 지나간다.
투명인간처럼. 투명인간 같은 얼굴로
얼마나 많은 사연들, 곧 깨어질 것 같은 사연들을 투명 유리 같은 얼굴에 가두고
그렇게 찬바람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간다.
무언가 저마다의 상념에 열중하며 아슬아슬 곧 깨어질 것 같은 도시의 어둠을 관통하며 간다
어느 푸른 저녁에, 세상의 모든 바람이 회색 거리의 모든 것을 휩쓸고 다시 돌아올 것 같은 그 푸른 저녁에..
나는 아주 오래전 세상을 떠난 기형도라는 한 남자를 상상한다
만 29세의 푸른 남자를...
끝없이 길 위에서 중얼거리며... 푸른 깃을 세우며 총총거리며
끝없이 헤매면서... 곧 무너질 것들, 폐허가 될 것들만을 그리워했던 그 남자를..
더 이상 찾지 말라고 했던 그 남자를...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이 한떼로 몰려오고
황폐를 은폐하기 위해 나무들이 유난히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내는
그 저녁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나
돌아갈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던 그 남자는 더 이상 찾지 말라고 끝없이 중얼거렸다.
2025년의 2월이다.
간절기 같은 달... 점이지대 같은 달... 입춘이 다가온다
2월은 시작과 끝, 끝과 시작이 뒤섞여있다.
햇살이 이토록 부서질 듯 고운데
담주부터는 다시 눈 소식이 있다. 겨울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으나 봄은 오고 있다.
지난해 동안 몸부림치며 두 번째 산문집 <빨강 수집가의 시간>을 출간하고 나니 허탈하다
나를 고통스럽게 괴롭혀 온 잉태물.
막상 그 고통과 고민과 불면의 흔적을 세상에 쏟아내고 나니
몸과 마음이 아파온다. 계절 탓이려니 싶다.
2월이라는 간절기처럼...... 마치 떠나지도 못하면서 떠날 준비를 하는 여행자처럼
마음이 스산해진다.
무언가에 마음에 들뜨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의 푸름이 사라졌다는 것일까? 사라져 간다는 것일까?
1989년 3월 시인 기형도는 죽고 1989년 5월 그의 유고시집은 태어났다.
‘나를 찾지 말라’고 길 위에서 중얼거리던 시인은 세상에 없고 시집은 세상에 살아있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나는 책상 옆 작은 책꽂이에 그의 시집을 놓아두고
수시로 그를 불러낸다.
마음이 황폐해질 때. 분명 어딘가를 향해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할 때
나의 처방전은 그를 불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를 불러내면 길이 더 아득해 보인다는 것...
희미한 안개 같은... 그러나 여전히 푸르른...
석고상 같은 혹은 투명인간 같은 사람들의 숲에서
나는 어깨를 부딪히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는 마음이 더 스산해진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나는 경계와 보호, 차단의 역할을 하는 낡고 익숙한 껍질 속에 여전히 웅크리고 있다. '나'로부터 '나'를 벗겨내야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저항하는 기억들에 맞서 온몸으로......(본문 중에서)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