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랑스러운 점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자 몰락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주어가 없는 세상
어떤 행위를 서술하는 문장에는 그 행위의 주체가 되는 주어가 있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 ‘봄이 온다’ 같은 문장들의 주어는 ‘나는 걷는다’와 같은 문장의 주어와는 다르다. 그것들은 문법적이고 형식적인 주어지만 그것들이 보여주는 행위는 그들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배후에는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어떤 다른 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다른 주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의 법칙이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신의 섭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사물이 아닌 인간이 주어의 자리에 놓일 때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 아닌 다른 것의 의지에 의해 등 떠밀려서 주어의 자리에 서지만 진정한 주어는 뒤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걷는다’고 할 때 걸음을 걷는 주체는‘나’이지만 그 뒤에는 내가 걷도록 만드는 제3의 주체가 있다. 이를 테면 두려움- 뒤처지는 것에 대한, 멈춰 있는 것에 대한, 걷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한-이 나를 걷게 한다고 문장을 바꿔 쓰면 ‘나’는 곧바로 주어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쩌면 개인을 명목상의 주어의 자리에 앉히고 실은 영원히 무언가의 목적어로 살게 하는 세상인지 모른다. 진정한 주어가 없는 세상. 누구도 주인공이 아닌 세상, 욕망이나 두려움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유일한 주어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상.
안규철 < 사물의 뒷모습 > 수록글
주어가 없는 세상...
누가보아도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때 대개는 주어 ‘나’를 쓰지 않는다
나는 생각하고 나는 걷고 나는 먹고 나는 움직이고 나는 숨을 쉬고....
당연히 ‘나’는 주어의 자리에 놓여있다.
안규철은 ‘나는 걷는다’라는 아주 짧은 문장 속에서 ‘나’가 온전히 주어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능동적으로 행위의 주체로서 걷고 있지만 나를 걷게 만드는 제3의 주체(안규철의 정의대로)가 두려움일 수도 욕망일수도, 분노나 불안일 수도 있다.
뒤처질 것 같은 두려움이 걷게 만들고, 지고 싶지 않은 욕망이 걷게 만들고, 분노가 일어나서 걷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마음을 뒤흔드는 불안이 걷게 만든다면 ‘나’라는 주어는 얼마나 왜소해지는가.
'나는 생각한다'라고 적었지만
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제3의 주체가 있다. 나를 생각하도록 끊임없이 조정하는 것.
자꾸만 생각하라고 은연중 강요하는 그 무엇이 분명 있다.
파울클레 <검은 왕자> 1927년
검은 바탕에 왕관. 기호처럼 보이는 것들이 그려져 있다. 온전하지 않은 형체만으로도 우리는 ‘검은 왕자’라는 제목에 동의한다. 왕관이 있으니까. 화려한 목장식의 일부가 그려져 있으니까,
동그란 단추 같은 두 눈, 선으로 표현된 코와 입, 그의 얼굴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왕자로 인식한다.
파울클레 <머리, 손, 발, 심장> 1930년
머리와 손과 발과 심장은 별도의 것처럼 분리되어 있다.
주어가 있으나 실은 주어가 없는 문장들처럼
파울클레의 그림은 온전히 보여주는 않은 형태들로 온전한 것을 상상하게 한다.
검은 왕자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들. 검은 배경 속에 제3의 것들이 존재한다. 검은 배경 속에 감춰진 것들이 검은 왕자를 왕자답게 하는 '주어'인 셈이다. 하얀 배경 속 분리된 손과 발, 심장 머리를 이어주는 제3의 것들이 존재한다. 모든 분리된 역할을 연결해 주는...
2월은 주어가 없는 달처럼 여겨진다.
날씨도 시간도 끝없이 혼란스럽고 변덕스럽다
분명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
‘나’는 주어가 아니다. 무언가가 나를 움직이고 있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그가 다리일 뿐 어떤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운 점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자 몰락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니체 <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월은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가는 달이고... 나는 이제 어디로 건너가야 할까.. /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