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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이 새들이 모두 이렇게 죽어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가리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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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테라스로 나와 다시 고독에 잠겼다. 물가로 밀려온 고래의 잔해, 사람의 발자국, 조분석으로 이루어진 섬들이 하늘과 흰빛을 다투고 있는 먼바다에 고깃배 같은 것들이 이따금 새롭게 눈에 띌 뿐, 모래언덕, 바다, 모래 위에 죽어 있는 수많은 새들, 배 한 척, 녹슨 그물은 언제나 똑같았다. 카페는 모래언덕 한가운데 말뚝을 박고 세워져 있었다. 도로는 그곳으로부터 백 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으므로, 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첫 담배를 피우면서 모래 위에 떨어져 있는 새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살아서 파득거리는 것들도 있었다.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새들은 더 남쪽도 더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새들은 진짜 비상을 위해 이곳으로 와서 자신들의 몸뚱이를 던져버리는 것일까, 피가 식기 시작해 이곳까지 날아올 힘밖에 남아있지 않게 되면, 차갑고 헐벗은 바위뿐인 조분석 섬을 떠나 부드럽고 따뜻한 모래가 있는 이곳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서, 쿠바에서 전투를 치른 다음,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는 안데스 산맥 발치의 페루 해변으로 몸을 피한다. 마흔일곱이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 오직 바다만을 친구로 삼고, 페루 해변의 모래언덕 위에 있는 카페의 주인이 되는 데에도 설명이 있을 수 있다. 바다란 영생의 이미지, 궁극적인 위안과 내세의 약속이 아니던가?...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야 할 터.


어떤 새들은 아직 모래 위에 앉아 있었다. 새로 도착한 새들이었다. 그들은 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바다의 섬들은 조분석으로 덮여 있었다. 가마우지 한 마리가 평생 만들어내는 조분석으로 같은 기간 동안 사람의 일가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으니 수지맞는 사업이다. 그렇게 지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새들은 이곳에 와서 죽는다...

"그는 테라스로 나와서 다시 그 고독의 정경 속에 잠겨 들어갔다. (…) 나이가 마흔일곱 쯤 되고 보면 그래도 배울 만한 교훈은 체득한 셈이고 위대한 목적에도 아름다운 여자에도 이제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까. 다만 아름다운 풍경으로 마음의 위안을 찾게 된다. 풍경이란 거의 배반하는 법이 없다."


아침이면 언제나 그렇듯이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놀란 눈길로 바라보면서 “이런 얼굴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길고 여윈 얼굴에 피로한 눈빛과 애써지은 냉소적인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는 이제 아무에게도 편지를 쓰지 않았고 누구에게서도 편지가 오지 않았다.


바다는 다양한 농담의 젖빛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모래 언덕 뒤 무너진 낡은 방파제 근처에서는 바다표범들이 울고 있었다. 커피를 데우기 위해 불에 올려놓고 테라스로 나왔을 때 모래언덕 오른쪽 발치에 모로 누워있는 해골 같은 사내와 그 옆머리부터 발끝까지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을 칠하고서 팬티만 입고 웅크린 사람의 몸뚱이와 루이 15 세풍의 하얀 가발, 푸른 궁정의상, 하얀 실크바지 차림 거구의 흑인 사내의 모습이 처음으로 눈에 띄었다....

가마우지들이 흰색과 회색의 연기 기둥처럼 물고기 떼 위를 선회하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여자를 발견했다. 에메랄드 빛 원피스에 초록색 스카프를 손에 들고 물속에 잠긴 스카프를 끌며 암초를 향해 걷고 있었다. 물은 그녀의 허리까지 찼다.


그는 잠시 더 지켜보았다. 여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바다는 고양이처럼 묵직하면서도 유연한 동작으로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 그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따금 발밑으로 새의 몸뚱이들이 느껴졌지만 대부분 이미 죽은 것들이었다. 새들은 언제나 밤에 죽어갔다..... 마침내 그 여자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가 여자의 팔을 잡자 그녀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자의 팔을 단단히 쥐고 해변으로 끌어당길 때 저항하지 않았다.

극도로 창백한 얼굴은 섬세했고 아주 진지하고 커다란 두 눈, 다이아몬드 목걸이, 귀고리, 반지와 팔찌.. 초록색 스카프.. 새벽 여섯 시, 죽은 새들로 뒤덮인 이 후미진 해변에서 금과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로 치장한 채 이 여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날 내버려 뒀어야 했어요.”

“몇 미터만 더 갔으면 물결에 휩쓸려갔을 거요, 이곳 파도는 몹시 사납소.”

“이 새들은 모두 어디서 오는 건가요?”

“먼바다에 섬들이 있소. 조분석 섬들이오. 새들은 그곳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서 죽소.”

“왜요?”

“모르겠소 갖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요.”

“혼자 사시나요?”

"그렇소"

”이곳에 있어도 될까요? “

”원하는 만큼 있어도 좋소. “


그녀는 흐느꼈다. 그가 대책 없는 어리석음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그 무엇에 다시 점령당하고 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체념을 거부하고 줄곧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 싶어 했다. 그는 삶 깊숙이 숨겨져 있는, 황혼의 순간 문득 다가와 모든 것을 환하게 밝혀줄 그런 행복의 가능성을 은근히 믿고 있었다. 대책 없는 어리석음 같은 것이..

바다란 소란스러우면서도 고요한 살아 있는 형이상학, 바라볼 때마다 자신을 잊게 해 주고 가라앉혀주는 광막함, 다가와 상처를 핥아주고 체념을 부추기는 닿을 수 있는 무한이었다.


여자는 너무나도 젊었고 너무나도 막막해하며 믿음에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많은 새들이 그 모래언덕으로 와서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봐 오지 않았던가. 그중 가장 아름다운 새 한 마리를 구하고 보호해 여기 세상의 끝에 자신과 더불어 머물게 함으로써, 종착점에 이른 자신의 삶을 성공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한순간 그의 얼굴에 맑은 표정이 떠올랐다.

”이곳에 머물게 해 주세요. “


하지만 그는 습관이 되어있었다. 사람을 쓰러뜨리고 뒤엎고 바닥으로 내던졌다가 두 팔을 뻗고 두 손을 들어 올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가 지푸라기가 눈에 띄는 순간 매달릴 시간만 남겨놓고 놓아버리는, 먼바다에서 다가오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고독의 아홉 번째 파도에.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유혹일 것이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젊음의 그런 유별난 집요함에 얼떨떨해진 채 고개를 내저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런 자신이 정말이지 절망적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하시오. “

그녀야말로 왜 이곳 모래언덕까지 와서 죽으려는 것인지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새일 터였다. 한 가지 설명은 있어야 하고 언제나 있을 테지만 모른 들 무슨 상관인가..

마침내 세상을 품에 안아 더 나은 운명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해주는 부드러운 어깻짓에는 어떤 무구함이 서려있었다. 자크 레니에. 넌 결코 달라지지 않을 거야, 하는 냉소적인 생각으로 그는, 자신의 팔과 어깨와 손에 매달려있는 여자를 보호해주고 싶은 욕구에 애써 저항했다.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거리의 사육제 인파 속에 있었는데 그들이 날 차에 태워 이곳으로 데려왔어요. 그러고는... 그러고는... “


그는 유리문을 통해 모래언덕 발치의 세 사내를 바라보았다. 침대 머리맡 탁자 서랍에 권총이 있었지만 즉각 그런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들은 결국 혼자서 들 죽어갈 것이고, 잘하면 그 편이 더욱 고통스러울 터였다..... 그녀는 울부짖고 몸부림치고 애원하고 도움을 청했을 텐데 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에메랄드 빛이 감도는, 바다 같은, 약간 멍하고 맑고 깊은 눈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의사를 만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죠. “

“끝내고 싶었어요. 끝내야 해요.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살고 싶지 않아요. 내 몸이 혐오스러워요.”

가슴 아래 두 마리의 새가 파닥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문득 조바심에 사로 잡혔다. 수치심과 분노가 뒤엉킨 감정.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피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이 모래 위를 걸으며 아직 파드득거리는 새들을 찾아내서 신발 뒤축으로 숨을 끊어놓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아이들 몇몇을 두들겨 패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자신이 이 연약하고 상처 입은 존재의 호소에 이끌려 그것을 끝장내고 있지 않은가...

그는 저항하려 애썼다. 그를 무너뜨리려는 고독의 아홉 번째 파도가 다가온 것뿐이었다. 그는 휩쓸리기를 거부했다. 다만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몇 초만 더 그 젊음을 들이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제발 그 일을 잊게 해 주세요. 도와주세요.”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세상 끝에 있는 이 카페에. 이 오두막에 머물길 원했다.

불현듯 수십 년간의 고독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아홉 번째 물결이 그를 쓰러뜨리고는 그녀와 함께 먼바다로 그를 휩쓸어갔다.

물결이 물러가고 기슭으로 돌아온 그는 그녀가 울고 있음을 느꼈다....


다음 순간테라스에서 말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왔다. 모래 언덕의 세 사내를 떠올리고 퉁겨지듯 일어나 권총을 찾으러 갔다. 멀리서 바다표범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늘과 물 사이에서 바닷새들이 울어댔고 해변 위로 거대한 파도가 부서져 말소리를 모두 덮었다가 물러갔다.

지팡이를 짚은 턱시도 차림의 오십 대 남자가 여자의 초록색 스카프를 만지작 거렸다.

열린 문틈으로 레니에를 발견하고는 냉소적 미소를 지으며 스카프에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조롱과 원한에 찬 듯한 서글픈 미소가 뚜렷해졌다. 그의 곁에는 투우사 복장에 매끄러운 흑발의 잘생긴 청년이 도르래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고. 나무 층계 위에는 잿빛 유니폼에 모자를 쓰고 팔에는 여자용 외투를 걸친 운전수가 난간에 한 손을 짚고 서 있었다.

“큰 파도, 대양, 자연의 힘이라... 당신은 프랑스인 같소만? 그렇다면 그녀는 길을 되돌아온 셈이군. 그녀와 나는 프랑스에서 일 년 정도 머물렀는데 실속 없는 면성뿐 아무 효과도 없었소. 이탈리아로 말하면... 저기 있는 내 비서는 이탈리아인이 오만..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소.”


영국인은 우울한 눈빛으로 모래언더로 고개를 돌렸다.

해골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누워있었고,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을 몸에 칠한 알몸의 사내는 모래 위에 앉아 병 주둥이를 입에 물고 있었고, 하얀 가발에 궁중복을 입은 흑인은 바다에 오줌을 누고 있었다.

“저자들 역시 분명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했을 거요.... 이 세상에는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놀라운 일이 있지..... 죽어있는 저 새들은 모두 어디에서 온 것이오? 수천 마리는 될 것 같은데... 새들의 무덤이라니 혹시 전염병이오? ”

“아 당신 거기 있었군. 걱정하던 참이었어. 그 일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차 안에서 네 시간 동안 마음 졸였지. 어쨌든 이곳은 세상의 끝이니... 불행은 순식간에 닥치는 법이니까.”

“날 내버려 둬요. 당신을 증오해요. 왜 날 따라다니는 거죠. 그러지 않겠다고?”

...

“당신은 취했어요. 또 취했다고요.”

“절망감 때문에 마신 것뿐이오. 여보 차 안에서 네 시간이나 기다리는 동안 온갖 생각이 다 떠올라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못된다는 건 당신도 인정해야 할 거요.”

여자는 흐느끼고 있었다. 레니에는 생각하지 않으려, 이해하지 않으려 애썼다.

바다표범들이 내는 소리, 바닷새들의 울음소리, 바다가 포효하는 소리만을 듣고 싶었다...

“어째서 날 구해줬어요? 파도가 한 차례 밀려오면 그걸로 끝났을 텐데. 지긋지긋해요. 더 이상 이렇게 살 순 없어요.”

“내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표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주인장... 우리 둘 다 당신 은혜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요.... 우린 몬테비데오로 귀즈망 교수를 만나러 갑시다. 그는 기적적인 결과를 얻어낸 모양이오. 안 그런가, 마리오?”

....

“생각해 보게. 몸무게가 정확히 오십이 킬로그램인 기수들과 일을 벌여야만 기쁨을 느끼는 사교계의 숙녀를... 그 짓을 하는 동안 세 번은 짧게, 한 번은 길게 밖에서 노크를 해달라고 번번이 요구하는 숙녀를 말이야, 금고의 경보음이 울려야만 욕구를 느끼는 은행가의 아내를.... 귀즈망 교수는 그런 여자들을 모두 치료했다네. 그들은 모두 훌륭한 주부가 되어있다오”

영국인은 울고 있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 순 없어.


그녀는 층계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맨발로 모래 위를, 죽은 새들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스카프가 들려있었다. 그는 인간의 손으로도, 신이 손으로도 덧붙일 것이 없는 순수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영국인은 여자가 탁자 위에 놓아둔 코냑 잔을 집어 들어 단숨에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모래 언덕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새들이 모두 이렇게 죽어있는 데에는”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이유가 있을 거요.”


그들은 떠나갔다.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여자는 모래 언덕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저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그것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페는 비어있었다.



오래전에「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기억이 있다. 가슴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가 싶어 한참 귀를 기울이니 모래가 버석거리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새들의 울음소리. 날갯짓을 멈춘 새는 세상의 끝이고, 그 끝에서도 버리지 못한 희망이고, 그 희망의 끝에서 뱉어지는 모욕과 경멸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끝의, 생의 비리고 안타까운 아름다움이라니. 로맹 가리를 쫓아가다 보면 나는 늘 페루에 있다. 새들이 그곳에 와서 죽는 이유는 어쩌면 내 삶의 이유와 같다. 차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러나 바로 그것인, 내 삶의 단 한 가지의 이유. - 김인숙 (소설가)



인간이라 - 우리로서는 물론 이의가 전혀 없고말고 언젠가는 인간이 될 게 아닌가! 좀 더 참고 좀 더 버텨야 해. 일만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잖아. 이 친구들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해. 뭐니 뭐니 해도 크게 보고. 지질학적 시대 단위로 시간을 헤아리는 법을 배우고,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네. 그러면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 인간의 시대가 올 때 그 자리에 남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 사샤 치포스킨 < 달빛 산책>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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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가리의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세상의 끝.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새들은 더 남쪽도 더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자크 레니에... 산전수전, 인생의 쓰고 단맛을 모두 겪은 남자. 마흔일곱. 알만한 것은 다 알고 있는 남자. 더 궁금할 것도 더 배워야 할 것도 없는, 이제 죽어도 아무것도 아쉽지 않은 남자는...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세상의 끝 같은 페루 해변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늘 같은 풍경... 멀리서 날아와 마지막 숨을 내쉬는 새들의 최후, 아직 숨이 붙어있어 해변에서 파닥거리는 숨소리를 들어야 하는 한 남자가 바다를 바라본다.

사육제 기간... 바다표범 소리가 흐느낌처럼 들려올 때 해골 같은 남자, 궁정 복장의 흑인남자, 파랑, 빨강, 노랑 줄무늬 칠을 한 남자가 보이고 한 여자가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파도가 그녀를 삼키기 전 온 힘을 다해 달려가 그녀를 구하고.. 카페로 데려온다.

극도로 창백한 얼굴은 섬세했고 아주 진지하고 커다란 두 눈, 다이아몬드 목걸이, 귀고리, 반지와 팔찌.. 초록색 스카프.. 새벽 여섯 시, 죽은 새들로 뒤덮인 이 후미진 해변에서 금과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로 치장한 채 이 여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곳에 머물러도 되냐는 그 여자의 물음에

레니에는 이미 오랫동안 포기해 버렸던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 싶어진다..

그가 대책 없는 어리석음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그 무엇에 다시 점령당하고 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체념을 거부하고 줄곧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 싶어 했다. 그는 삶 깊숙이 숨겨져 있는, 황혼의 순간 문득 다가와 모든 것을 환하게 밝혀줄 그런 행복의 가능성을 은근히 믿고 있었다. 대책 없는 어리석음 같은 것이.. 여자와 인생의 마지막을 성공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은 대책 없는 기대까지도...

여자는 “간절히 원해요.”를 반복한다.


여자의 남편 로저와 이탈리아인 투우사 마리오, 운전기사가 레니에의 카페로 들어왔을 때

레니에는 해변에 누워있던 세명의 남자로 착각하고 권총을 챙긴다.

이때부터가 소설의 반전이다.

영국인 남편 로저와, 이탈리아인 투우사 겸 비서 마리오, 운전기사는 해변에서 네 시간 동안 세명의 남자로부터 겁탈당하는 아내를 지켜보았다.

세상의 끝까지 와서도.. 20대의 젊은 비서 마리오도... 저 세명의 남자도... 결국 성공하지 못했으리라는 묘한 암시를 하며 영국인 남편 로저는 몬테비데오로 가서 귀즈망 교수의 심리 치료를 받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위험에 처한 한 여자를 구해내고... 영웅적 심리에 가슴이 뜨거워진 레니에는 오갈 데 없는 살아있는 새 한 마리를 돌보고 싶은 희망을 품었었다. 이 아름답고 어린애 같은 여자를 품에 안고 다시 인생을 새로 살 것 같은 어리석은 희망을.. 그런데 그 희망은 모욕과 경멸로 바뀐다.

물질적으로 모든 것을 가진 여자, 그러나 성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삶에서 어떠한 만족도 느끼지 못하는 여자의 불행. 남편 로저는 물론 투우사 마리오까지도... 세명의 거친 남자들 까지도..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녀의 우울이든 결핍이든 자조든..

여자가 흐느낀다는 것은 아무런 열망을 느끼지 못함에 대한 자기 불만의 눈물이다.

물질로 채워지지 않는 원초적 본능을 치료? 하기 위해 여자의 방황은 이어졌던 것일까. 채워지지 않는 허기. 다이아몬드 목걸이로도 해결되지 않는 것.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 잊고 싶다는 말은 위험에 처한 여자의 성적 수치감 때문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삶의 의미든 원초적 욕망이든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한 여자의 자조적 독백 같은 것이 아닐까.


여자는 죽은 새들을 밟으며 모래 언덕을 향해 걸어가고 그들은 떠난다.

“이 새들이 모두 이렇게 죽어있는 데에는”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이유가 있을 거요.”

그들은 떠나갔다.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여자는 모래 언덕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저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그것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페는 비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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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모두 이렇게 죽어있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을 것... 이란 냉소적이고 쓸쓸한 영국인 남자의 독백 같은 말. 그들이 떠난 간 뒤 자크 레니에는 더 이상 카페에 없다. 아홉 번째 파도에 휩쓸린 자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러워 죽은 새들을 밟고 바다표범과 가마우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파도가 부르는 대로 바다를 향해 걸어갔을까?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을까?...


로맹가리는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에서 자크 레니에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

실제로 로맹가리는 이 소설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하였고 직접 감독을 맡았으며 로맹가리의 부인 진 세버그가 여자주연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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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보고 싶었으나 볼 수 없어 아쉽다. 얼굴을 찌푸린 광대 가면을 쓴 남자가 모래 해변에서 여자를 덮치는 장면의 사진에서 무표정한 여자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고통과 절규도 없는 무감각의 얼굴. 거기에 하얀 광대 얼굴을 보여주는 연출이라니..

누구든 가면 뒤의 얼굴이 진짜 얼굴이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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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가리는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페루의 외딴 바닷가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새떼를 보며 인생의 고독, 절망, 고통. 삶과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는 마지막 문장이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로맹가리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던 그는... 지상에서 임무를 마치고 과감히 추락하는 새들과 같은 운명을 보여주었다.


누구에게나 밀려오는 파도.. 자크 레니에는 아홉 번째 파도를 이겨내지 못하였다. 휩쓸렸다고 표현하였다. 인생이란 살면 살수록 두려움이 많아지고 불안감이 커지는 것 같다.

달력의 숫자들을 볼 때마다, 시계의 숫자들을 볼 때마다... 가슴에 희망이 차오르기 보다 어떤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느껴진다. 새들에게 페루의 세상 끝 해변은 인도의 바라나시 같은 것이라면....

저마다 인생을 지고 걷는 우리에게 바라나시는 어디일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마지막 피가 식어가기 전 과감히 추락해도 좋은 삶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새들이 이곳에 와서 죽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크 레니에가 아침이면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놀란 눈길로 바라보면서 “이런 얼굴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라고 중얼거리듯... 얼굴에 새겨진 시간의 지문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이 강력한 제목...

가장 로맹가리다운 제목이 아닐까...

삶과 죽음, 동전의 양면 같은 얼굴. 오늘 나는 삶의 얼굴 속에 존재한다.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아홉 번째 파도가 언제 몰려올지 모르지만

그래도 오늘은 동전의 앞면, 바로 삶의 편에 서 있지 않은가....

아직은.... 해야 할 일을 지속적으로 쉬지 않고 해야 한다... 내 안의 아직 죽지 않은 '빨강'을 깨워야지... 심장의 소리를 들어야지.... 아직은 2월이 아닌가. /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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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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